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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한국문학

[도모유키 - 조두진] 명량의 이순신, 그 적敵편에는 사람이 있었다




도모유키

저자
조두진 지음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 2005-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냉혹하리만큼 간결한 문체, 분방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신선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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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의 자취는 개인의 역사가 된다. 마찬가지로 한 민족이나 국가가 유지된 시간의 흔적도 역사가 된다. 개인사던 민족사던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한 편 지극히 주관적이다. 유신정권 시절을 누군가는 경제부흥을 꽃피우던 도약과 희망의 시기로,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폭력적인 야만의 시절로 기억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대통령이 후보시절 인혁당사건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자, "두 개의 판결이 나오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한 것은 어쩌면 이런 역사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국가와 민족, 영토의 개념이 명확해진 근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애국심은 소위 범접한 수 없는 신화가 됐다.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군과 웅녀의 자손으로 편입됐다. 게다가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과거 때문에 하나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더욱 공고해졌다.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따른 도농, 계급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부분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산업화가 완성되고 민주주의가 정착했다는 지금 21세기까지도 애국심은 신성한 것으로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터부의 지위를 내주지 않고 있다. 스스로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단 기간 내에 천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명량>에서 관객들은 거의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죽어가는 조선군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격침당하는 일본군 전함을 보면서 환호했다. 이것은 우리의 분위기로 보자면 당연한 반응이다. 반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조선인이던 일본인이던 스스로가 원한 적 없는 싸움에 끌려와 물귀신이 되고 목없는 귀신이 되는 전쟁의 비극에 공통적으로 아픔을 느낄 수도 있다. 전투에 참가한 모두는, 그 태생이 일본이던 조선이던 부모와 처자식과 헤어져 억지로 고향에서 끌려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장병들과 이순신의 수군들 사이에는 우리가 머리 속에 그은 국가의 전선보다는 생존과 죽음 사이의 사선이 훨씬 절박했을 것이다. 


조두진의 <도모유키>는 위에서 지적한 역사인식을 반영한 전쟁소설이다. 정유재란에 참가한 일본인 하급무사 도모유키를 화자로 내세워 비극의 전장을 그렸다. 영화 <명량>이나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보면서 참수되는 왜군들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 독자라면 특히 추천해 드리고 싶다. 그것은 우리편과 상대편을 나누는 단순한 구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네오가 먹었던) 일종의 '매트릭스의 알약'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싶다. 전쟁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를 가리지 않고, 춥고 배고프며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비극의 종합선물세트임을 일깨워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2 개정판, 197p.


풀을 삶아낸 멀건 국물에 쌀을 삶아 마셨다. 병졸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고 푸른 물을 마셨다. 정신을 한 곳에 모으지 않고는 삼키기 힘들었다. 푸른 물을 삼킨 병졸은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설사를 거듭하던 병졸들은 엎어졌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조두진, <도모유키>, 한겨레출판, 2005, 109p.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 누구도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침략한 자와 침략받은 자 모두에게 평등했다. 도모유키의 일본 육군이 먼바다의 조선 수군을 두려워했고 한 편으로는 부러워했다.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해안가에 성을 쌓고 농성 중인 일본 육군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했다. 서로 상대편은 넉넉한 군량에다 월등한 무력을 갖췄다고 오해하면서 말이다. 양측의 병사들을 괴롭힌 향수병과 죽음의 공포는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허무했을까.


최근 다시 읽은 <칼의 노래>와 쌍을 이뤄 <도모유키>를 보고나면 7년간의 전쟁이 가진 의미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간파쿠關白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쟁도 아니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전쟁도 아닌 자들의 전쟁.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은 적敵과 아我를 구분할 수 없는 또다른 전장을 만들어낸다. 조선군이 조선인의 시체에서 목을 베어 전과로 보고하고, 일본군이 일본군 시체에서 코와 귀를 베어 전과로 보고하는 상황에서 적은 무엇이고 아는 무엇일까.


어쩌면 병졸 하나까지 거두라고 했던 간파쿠의 말은 거짓인지도 몰랐다. 사사키 혼자 처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성주 고니시 유키나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시키도 고니시도 간파쿠도 믿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적과 아는 따로 구분돼 있지 않다. 도모유키는 진저리 쳤다.


- 조두진, <도모유키>, 한겨레출판, 2005, 217p.


지금도 우리는 과거의 구원관계로 얽힌 일본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를 안고 산다. 민족적 감정이라 불리는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가족 잃고 고향 떠난 이들 간의 살육전을 장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멀리 오사카 성 깊숙한 곳에서 호랑이 가죽에 앉아 있던 히데요시와 역시 멀리 의주의 임시행궁 깊숙한 곳까지 몽진한 선조임금의 싸움은 도모유키와 이순신 간의 싸움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 아닌 사람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