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극장가의 스크린을 휩쓸고 있다. 수많은 관객들이 배우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지켜봤다. 언제나 그랬듯이, 영화가 화제가 되면 서점가에도 영향이 미쳐 그 영화의 원작이나 관련 서적이 일시적인 붐을 일으키곤 한다. 영화 <명량>의 흥행이 서점가로 전해져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정유재란 관련 서적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2001년 소설가 김훈이 발표한 <칼의 노래>가 새삼 다시 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소재의 영화가 흥행하면 그 때는 김훈의 <남한산성>이 다시 읽힐까)
광화문 앞에 서 있는 이순신은 단단해 보인다. 환도를 땅에 짚고 갑옷을 입은 장군의 동상은 늠름하며 강한 기운이 넘쳐 보인다. <칼의 노래>에서 그리는 이순신은 늠름하지도, 용맹이 넘치지도 못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된 뒤 문초를 받고 목숨만 건져 백의종군에 처한 이순신을 그리면서 시작되는 <칼의 노래>에서 광화문 앞 동상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임진년의 총탄에 상한 어깨와 장독杖毒으로 욱씬거리는 허리로 고생하는 늙은 장수다. 내면적으로도 지쳐버린지 오래다. <명량>의 이순신과 많이 닮아있다. 새삼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아동시절에 읽은 이순신 위인전, 20대에 읽은 <칼의 노래>, 30대에 관람한 영화 <명량>과 다시 읽은 <칼의 노래>.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어 가는 만큼 장군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졌고, 장군이 살던 시대를 살피는 안목도 달라졌다. 무패를 자랑하는 해군제독 이순신은 임금과 조정의 견제를 받는 외로운 장수로 보였고, 그 장수는 이제 적適과 적이 아닌자의 분간이 어려운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 인간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주입된 성웅 이순신의 강인한 이미지 속에는 자식의 죽음에 소금창고에 숨어 흐느끼고, 울부짖는 백성을 배에 태우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심한 부끄러움을 안고 사는 한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이순신은 전쟁 영웅 이전에 전란의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이었다.
사직의 존망이 걸린 대전란 중에서도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쟁과 암투는 그칠 줄 몰랐다. 이순신을 해임하고 고문한 조정은 후임자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조선수군이 몰살을 당하자 그제야 백의종군하던 장군을 복직시킨다. 임금은 자신의 멋쩍음을 면사免死 교지를 내림으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전선도, 군사도 없는 통제사는 비어버린 수영에 다시 부임한다.
그(권율)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방책이 있겠나?"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 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방책은 물가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것입니다. 연안을 다 돌아보고나서 말씀 올리겠소이다."
"고맙네. 속히 시행하게."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2 개정판
권력은 그렇게 책임을 묻는다. 조정은 스스로의 무능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의 권력을 두려워했다. 임금은 두려움에 이성이 마비되어 바람 앞의 등불같던 수군 사령관의 옷을 벗기고 죄를 물었다. 결국 한줌도 안되던 조선수군은 몰살을 당했다. 그러고나서야 이순신을 복직시켜서 방도를 묻는다. 지금의 정치사회 현실과 어찌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지.
장군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됐다. 겨우 수습한 전력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퇴각하며 수습한 판옥선 12척과 수백의 수졸들. 적의 앞에 나서자면 적은 너무 강하고 거대했고, 뒤로 물러서자니 임금과 조정의 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의 존재이유는 오히려 적인 왜군의 강대함에 있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장군은 요즘말로 그저 멘붕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2 개정판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특히 국민과 민생이 최우선이라고 입으로 떠드는 자들처럼) 군림하는 자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든, 태평의 시기에서든 민초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가와 종묘사직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이들은 입으로 '국가의 주인은 국민' 혹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떠들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국민과 백성을 아주 쉽게 외면하고 버렸다.
이순신이 살던 시절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백성들은 왜군의 잡역에 동원됐고, 부녀자들은 노리개가 되어 능욕을 당했으며, 아이들은 화살 혹은 조총의 표적으로 쓰였다. 수없이 수탈당하고 살육당한 조선 백성의 한서린 백골이 조선팔도를 뒤덮는 동안, 임금 선조는 이순신에게 왕릉을 파헤친 불경을 범한 왜군의 범인을 잡아내라 명한다. 죽어서까지 백골의 가치는 다른 것인가.
길에서 쓰러진 조선 계집과 포로들은 마차 바퀴로 뭉개버리고 적들은 또다른 고을의 조선 백성들을 끌어갔다.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말똥에 섞여나온 곡식 낟알을 꼬챙이로 찍어 먹었다. 아이들이 말똥에 몰려들었는데, 힘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쳐져서 울었다.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2 개정판
이 그림의 뒤로 어떤 오마쥬가 떠오른다. 가족을, 아이를 잃고 바닷가에서 통곡하던 유가족이 광화문 앞 길거리에 설 수밖에 없을 때까지, 정부는 청와대와 국회에 있었고 유가족이 호소할 정부 관공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거 뭐 교통사고 비슷한 것 아니냐"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운나쁘게 죽은 것뿐이라는 인식은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조정이란 혹은 정부란 언제 존재하는 것일까. 세금을 걷고 재능을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만 나타나는 조정의 관리 혹은 정부의 공무원이라면 그 존재목적은 그저 군림일 뿐이다. 과거 왕조시대와는 다르게 공화정 국가인 대한민국은 국가와 국가의 역할을 집행하는 공무원의 역할을 헌법에 명시적으로 적고 있다. 위기와 재난의 상황에서 국가의 공무원은 국민이 필요로 할 때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7조 1항
헌법 조문은 멀고 권력은 가깝다. 권력을 가진 공무원들은 어쩐 일인지 국민들이 요구하는 책임을 이행하는데 소극적이다. 사안이 전혀 엉뚱한 정치쟁점화로 번지는 동안, 밝혀진 사건의 실체도, 원인규명도, 죄있는 사람들도 없다. 책임지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젠 그저 유병언의 시체가 진짜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고, 유대균이 치킨을 시켜먹었느냐 아니 먹었느냐를 두고 보도의 사실 여부를 따지고 있다. 권력의 심기는 통곡하는 국민들에게서 불편함을 느끼는 듯 하다. 권력의 안위가 중요할 뿐인 사람들과 통곡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사이는 한강의 이쪽과 저쪽보다 먼 듯하다. 통곡은 강이 돼서 흐르고, 흘러내린 통곡은 분노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화석처럼 굳어진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를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던 전란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이순신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 김훈은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나간 많은 이들을 보고 막막함을 느낀 듯하다. 이순신은 그 중에서 가장 도드라져보인 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시대와 사회의 실체는 변한 적이 없고, 적과 적이 아닌자, 나와 내가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없는 뒤엉킴 속에서 각 개인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야 하는 것일까. 이 무거운 실존적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는 이상, 영화 <명량>을 관람하고 나온 뒤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은 뒤의 물먹은 마음을 다잡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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