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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에너지 불평등과 우리 안의 파시즘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영국인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대화 중 그는 뭣 때문인지 내게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평소 생각대로 "그것은 야만적이고 끔찍하다"고 답했다. 영국인 남자는 다시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10명 중 9명이 행복하고 1명이 불행해진다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럼 그 나머지 한 명은?"이라 되물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보는 Liberalist라며 매우 반가워했고 이런저런 주제로 내 짧은 영어가 한계에 이르도록 말을 걸었다.


밀양에서 벌어진 송전탑 건설 강행 관련 사태들은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먼저 후쿠시마 사태 당시에도 한 번 했던 이야기지만, 에너지 불평등의 문제다.


(냉각수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원자력발전소는 인구가 적은 바닷가에 세워지는게 보통이다. (그래서 부산이나 인천은 안된다) 여기서 생산된 에너지는 (밀양처럼) 또다시 인구가 적은 지역을 통과하는 긴 송전선을 거쳐 대도시로 공급된다.


에너지 생산에 따른 위험과 고통은 벽지에 사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짊어지는데 반해, 에너지의 편익은 거의 대부분 대도시 주민들의 몫이 된다. 원전 부근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줬지 않느냐 할 수도 있다. 허나 인간의 목숨과 안전을 담보로 제공한 금전적 보상은 흡사 총알받이 경호원에게 넉넉한 급여를 챙겨주는 독재자의 선택과 다르지 않아 도덕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에너지 생산에 따른 위험은 전가하고 편익만 착취해가는 구조를 반영구적으로 고착화 시킨 반면에 보상은 일시적이거나 일정기간만 제공되니 부당거래도 이런 부당거래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문제가 바로 영국인 남자가 내게 던진 질문에서 출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된 에너지의 혜택을 입으며 살아간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PC와 스마트폰이 움직이는 게 다 그 덕분이다. 문명의 이기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이면에는 혜택을 보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소수인 사람들의 피해와 희생이 존재한다.


수리적인 계산과 경제학적 효용이론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는 선택이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전체주의적 태도에도 들어맞으니 이 구조에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은 오히려 '외부세력'이 된다. 오래도록 살아온 터가 황폐화되고 마침내 떠나야 하는 1이 극렬히 저항하는데도 편리함을 누리는 9는 외면한다. 아니 더 정확히 관심이 없다. 기껏 나온 보도에도 '보상금이 적어서 그러나?'는 생각에 그치기 십상이다.


제주 강정에서 벌어진 해군기지 건설 문제에서도 '국방을 위한 건데?'라는 지극히 파시즘적 태도가 많이 엿보였다. 이번 밀양에서도 '그럼 에너지 소비가 느는데?'라며 뭉개는 '대도시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돈이면 마누라도 팔아먹게 생긴 사람들은 "그깟것 보상금 더 줘서 쫓아내 버리면 되지 않나? 돈이 적어서 그래~"라 말한다. 과연 서울시내 한복판으로 고압선이 지나는 송전탑 세운다고 하면 이 분들 뭐라 말씀하실까. 목적의 필요성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실현하려는 인간의 행복과 평화가 아닌가.


영국인 남자는 나를 리버럴리스트라 불렀지만 정확히는 아니다. 나는 그저 동양고전에서 읽었던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는 말씀을 기억할 뿐이다. 서양 경구에도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에너지 불평등의 구조 앞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은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이란 우리의 자부심을 무색하게 한다. 희생과 고통을 소수의 사람에게 떠넘긴 채, 고향을 잃고 삶의 터에게 쫓겨날 사람들을 외면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9가 피흘리는 1을 외면하고 냉소하는 지금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는다면 제2의 대추리, 용산, 강정, 그리고 밀양은 언제든지 다시 생길 것이며 그곳에서 당신도 눈물 흘리는 1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파시즘을 극복하고 유쾌한 외부세력이 되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