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볼 만한 사람들은 다 봤을 영화 <설국열차>. 이 영화를 통해 은근히 덕을 본 것이 '연양갱'을 생산•판매하는 해태제과(자웅동체 크라운이라고 해야되나)가 아닐까 싶다. 그건 바로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이 먹는 주식인 단백질바(Protein Bar) 때문이다.
(여기부턴 스포 포함) 커티스나 남궁민수, 그리고 여러 동료들이 앞칸을 향해 목숨을 건 진격을 하고 있을 때 나머지 꼬리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들 있었을까. "잘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설국열차가 결국 탈선하고 '열차 안'이라는 시스템이 붕괴되는 장면을 보면서 또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썩은내나는 바퀴벌레 단백질바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는 삶. 그것은 커티스와 그 동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자 생의 모순이었겠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겐 정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빙하기의 바깥세상에서 탈출해 열차를 탔고 살아남은 것이 감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바퀴벌레의 더듬이가 씹히는 단백질바를 씹더라도 서로가 인육을 탐해 살아남던 시절보다는 낫다고 안위하며 꼬리칸에서의 삶에, 그런 삶을 보장하는 설국열차의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적었겠느냐는 의구심은 여전하다. 그런 이들이 보기에 커티스나 남궁민수 같은 이들은 (한줌도 되지 않는) 꼬리칸의 안락과 안정을 깨뜨리려는 불온하기 그지 없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커티스에 의해 영원한 엔진은 멈추고 열차는 정지한다)
관객들은 설국열차가 단순히 만화를 원작으로한 공상과학영화가 아님을 느낀다. 오늘의 세계와 한국 사회를 되돌아 보면 과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가? 불편과 부당에 맞서 앞칸으로 진격하는 커티스와 그의 뒤에서 냉소를 날리며 방관하는 단백질바 소비층 중 어디에 가까운가.
꼬리칸에서 누구나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을 꿈꾸는 것이 오늘 한국의 대다수 청년들의 모습이다. 메이슨처럼 "나만 잘살면 돼"라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사고에 일침을 가하고자 한 봉준호 감독은 커티스에게 사로잡힌 메이슨의 비굴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점잖은 충고를 던진다. 하지만 감독의 몽타주가 그리지 못한 미장센에는 분명 메이슨을 동경하는 꼬리칸의 그 누군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도 잔인하고 부당한 룰을 강요하며 한반도를 달리는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 더러운 단백질바를 씹으면서도 메이슨을 동경하며 "위대한 윌포드님"을 외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영화에서 주인공 커티스와 남궁민수를 응원했던 것과는 반대로 현실에서는 커티스 같은 사람들을 불온한 자들로 여긴다. 영화보다도 못한 현실이다.
설국열차를 어떻게 해석하던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괴리된 의미로 해석될 때, 우린 여기에 곡해라는 단어를 쓴다. 철학적,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영화를 단순히 흥미를 위힌 공상과학영화의 나락으로 굴러떨어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관객 자신이다. 열차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중이며 당신은 여전히 꼬리칸에서 정체모를 단백질바를 씹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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