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저자
-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출판사
- 문학동네 | 2010-03-03 출간
- 카테고리
- 소설
- 책소개
- 미국 현대문학의 거대한 지평을 연 불멸의 걸작 영원히 잊지 못할...
한국인들은 유난히 술자리를 좋아한다. 파티문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술자리에서의 그 흥청거림, 엄밀히 말하면 술기운에 풀어헤쳐진 서로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다양한 주제들은 우리의 일상 그대로다. 낮시간의 뜨거운 태양에 달궈졌던 한국 사람들의 감정과 본심이 차가운 소주 한 잔에 식혀져 맺히는 그 시간은 일종의 축제다. 고대 조상들이 즐겼던 무천舞天 같은 행사처럼 여럿이 모여 집단적인 카타르시스의 장을 열고 묵은 감정의 때를 씻어내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끝도 없는 주제 중 공통적을 빠지지 않는 주제가 바로 이성에 관한 이야기다. 남자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여자얘기가, 여자들이 모인 술자리에선 남자얘기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질 않는 것이다. 정말 플라톤의 <향연>에 씌인대로 태초에 자웅동체였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 남녀로 갈라진 인간들이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마음을 사고 싶어하는 욕망은 길고도 끈질기다. 이 욕망을 우린 대략 사랑이라 부른다. 욕망을 느끼는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욕망하면서도 그 본질은 알기 어려운 '사랑', 당신은 그 정체를 알고 있는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영화화 되면서 다시 손에 든 <위대한 개츠비>는 과거에 읽었던 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언젠가 안철수 의원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자신은 '독서를 할 때 등장인물의 심리를 읽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과거와 달리 각 등장인물의 심리가 읽히고 이해가 되는 면이 많아 훨씬 읽기가 수월했다. 개츠비가 거대한 저택을 사들여 성과 같이 꾸미고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었던 이유, 바로 그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욕망에 대해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기 때문이다. 나도, 이 리뷰를 읽는 독자도,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개츠비, 데이지, 혹은 톰일 수 있다. 겹치지 않는 다고 해도 주위에 그런 사람들 몇 쯤은 두고 살기 마련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Great'한 이유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이지는 욕망하는 여자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의 작용이기도 하지만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선 언제나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인생이 당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 결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내려주어야 했다. 사랑, 돈, 혹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야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역,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188~189pp.
누구나 꿈꾸는 풍족하면서도 사랑이 충만한 삶. 그를 얻기 위한 교묘하고도 간사한 인간심리의 변화가 소설과 영화의 화려한 배경 아래 숨겨져 있다. 데이지의 속물근성만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 미묘한 심리가 우리 모두의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수입이 많은 배우자를 찾으면서 집안의 재산이 많은지를 궁금해 하는 일상의 우리라고 해서 데이지보다 나을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 돈, 혹은 안정된 조건만을 좇고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두기 위해 벌이는 남녀 간의 암투는 우리의 일상이며 그것을 숨김없이 표현해도 충분한 시대지 않은가.
데이지의 눈물이 가진 의미
그래서인지 개츠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개츠비의 셔츠를 얼굴에 묻고 흘렸던 데이지의 눈물은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는 셔츠 더미를 끄집어내 우리 앞에서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었다. 얇은 리넨과 두꺼운 실크, 질 좋은 플란넬 셔츠들이 테이블 위로 던져져 다채로운 색깔로 뒤엉켰다. 우리가 감탄할 때마다 그는 더 많은 셔츠를 가져왔고, 이 부드럽고 사치스러운 언덕은 점점 더 높아만 갔다. 문장이 새겨진 줄무늬 셔츠, 산홋빛의 체크무늬 셔츠, 사과빛 푸른 셔츠, 인디언 블루의 이니셜이 새겨진 라벤더빛 혹은 연한 오렌지빛의 셔츠들. 그 순간 갑자기 데이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셔츠 더미에 파묻고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 셔츠더미에 파묻혀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역,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117p.
그녀의 눈물은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참회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화려함과 사치로 가득찬 그 셔츠더미들에 대한 감동의 헌사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개츠비와 함께 했던 5년 전의 추억에 대한 복기의 감정이었을까. 수많은 관객과 독자가 데이지의 눈물을 지켜봤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눈물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알 수없다. 오로지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다. 하지만 관객과 독자는 스스로의 눈물에 데이지의 눈물을 대입한다. 데이지의 눈물에 스스로의 눈물을 대입해본 당신, 오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홀로 소금기둥으로 남은 개츠비
하락이란 말은 안중에도 없이 연일 호황을 누리던 20년대 월스트리트의 증권시장처럼 개츠비와 데이지, 톰이 벌이는 욕망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누가 더 강렬한지 내기라도 하는 듯 더욱 붉게 타오를 뿐이다.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의 욕망에 충실한 그들의 질주는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는다. 그 마지막에는 신의 노여움을 샀던 도시, 그래서 사라져 버린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자리하고 있다.
그를 용서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을 전부 다 제 입장에서 정당화해버렸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경솔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들, 톰과 데이지는 경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살아 있는 것들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그런 다음에는 돈이나 더 무지막지한 경솔함, 혹은 그들을 한데 묶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에 숨었다.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말끔히 치우게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역,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122p.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눈에 들어오자 톰과 데이지는 그를 외면해 버린다. 소돔과 고모라에 두고 온 자신의 사랑, 5년 간 자신을 지탱해 준 사랑을 믿었던 개츠비만이 홀로 남아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닉이 개츠비의 이름 앞에 '위대한'을 적어 넣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쓴 <제노사이드>에 등장하는 하이즈먼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65억의 인간은 100년 정도 지나면 다 죽을 걸세. 그런데 이렇게 서로 죽여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욕망하고 빼앗고 그래서 누군가를 해치고 상처준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탈을 둘러쓰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탈 아래 자리하고 있을 탐욕의 추악한 맨얼굴은 보지 못한 채 부나방처럼 달려들기 일수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장면이 더욱 허무해 지는 이유 역시 한갓 부나방이 돼 땅에 떨어지고 말 우리의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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