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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외국문학

[변신 - 프란츠 카프카] 가족이라는 이름의 감옥




변신

저자
프란츠 카프카 지음
출판사
소담 | 2002-1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레고르는 흉측한 벌레가 되어 버린 자신을 보았다. 악몽에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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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설날이 다가온다. 설이면 자주 보지 못했던 부모, 형제, 친척을 만나게 된다. 가족의 이름으로 이뤄진 그 모임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모이기만 하면 다투는 부모님의 형제들이나 말대꾸, 꾸중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모자식의 풍경은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미건조하면서도 오래된 모습들. 그럴 때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른다.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와 그의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맨살과 생리를 엿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한한 애정과 사랑으로 가득찬 따뜻한 공동체란 통념과는 다르게 카프카가 그리는 가족공동체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변신>은 짧다. 줄거리도 굳이 여기서 이야기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하지만 카프카가 표현한 가족의 이면은 날카롭다 못해 서늘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회사 외판원으로 근무하며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한다. 잠자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해야만 한다.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마치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생활을 해야했던 카프카 자신의 모습과 무척 흡사하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힘든 일을 시작했을까! 눈만 뜨면 출장이다. 사무실 근무도 귀찮긴 마찬가지지만, 외판은 훨씬 고되다. 게다가 출장을 다니다보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항상 열차시간을 염두에 둬야 할 뿐더러, 식사는 불규칙하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야 하는 건 또 어떻고,.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모든 만남이 일회적이다 보니 마음을 열고 친해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소담, 2002, 12p.


한국적으로 해석하자면 가족부양의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된 그레고르는 다 큰, 철든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은 것이다. 가족이란 공동체와 가정을 신성화한 사회의 압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는 그레고르는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네 아버지나 어머니도 어찌 지긋지긋하지 않았겠는가. 달리 생각해보면 이건 무서운 족쇄다. 그 족쇄의 이름은 가족이다. 카프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레고르 잠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한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부모님만 아니면 진작에 사표를 던졌을 것이다.


....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5,6년은 걸리겠지만, 어쨌든 부모님 빚만 갚으면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내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이 되리라.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우선 일어나야 한다. 새벽 5시 기차를 타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소담, 2002, 12p.


카프카도 결국 그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가부장적인 수직적 질서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기에 카프카도, 우리도 너무나 미약한 존재다. 그저 버텨야 할 뿐, 벗어던지지 못한다. 그 수직적 질서를 벗어난 카프카는 벌레로 표현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심지어 부모의 빚 때문에 고생하는 잠자는 순식간에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나마 밥을 챙겨주고 돌봐줬던 여동생도 점점 식어가고 결국 그레고르에게 관심을 써주는 사람은 가정부만 남는 장면에서 우리는 사랑공동체로 위장된 가족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사람, 심지어 가족마저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익살을 부림으로서 자신을 철저히 가렸던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의 모습이 마냥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인 집안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성장시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실격>과 <변신>은 그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 목수정 역시 <야성의 사랑학>에서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그곳(가족공동체)은 삶이 뭉쳐지는 1차적 공간이므로, 거기선 우리의 더러움도 추함도 감춰지지 않는다. 우리의 미와 추, 선과 악은 꼼짝없이 노출된다. 가족의 한 사람은 가장 원초적인, 옆 사람의 감정을 수용해 주어야만 한다. 가정은 지고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고통스런 혈육 간의 증오와 범죄가 생산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족은 바로 우리 자신처럼 누추하고 저열하며, 때때로 포근하고 편안하다. 거기에 성급히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려고 할 때 가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탄생한다. 감정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구성원인 아빠가 가장이란 계급장을 달고 경제적, 도덕적 권력의 수장으로 군림할 때, 애욕의 시건장치로서 기능해야 하는 결혼에서 거플간의 신뢰와 성적인 계약이 깨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성이 다가서며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면 그곳은 숨 막히는 감옥으로 변해 간다.


- 목수정, <야성의 사랑학>, 웅진지식하우스, 2010, p190.


가족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용기가 능력이 없다면, 혹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방법은 하나다. 그 수직적 질서에서 차지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아래를 지배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무서운 관성이 스스로를 옥죄었던 것은 잊은 채, 가족구성원인 또다른 타인을 억누르려 한다. 비슷한 사례는 주변에 많다.


누이동생과 나는 13살 터울이다. 띠동갑이 넘는 나이차는 아버지의 늦둥이 출산 때문이었다. 중학교 시절 겨울에 처음 만난 아이는 이제 키가 거의 나만한 여고생이 됐다. 그 동안의 성장을 옆에서 쭈욱 지켜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릴 적에는 같이 살았기 때문에 부득이할 때는 우는 아이를 업어서 달래야 하기도 했고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어머니가 장보러 나가시거나 집을 비우시면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동생 있는 친구들과 그룹채팅을 하다가 살짝 웃었다.


대학생이 되고도 군대까지 다녀온 나이의 훌쩍 커버린 동생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가슴으로 키웠다', '업어 키웠다'는 말에서 홀로 빵터지고 말았다. 물론 동생을 생각하는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선의를 고려해도 같은 형제끼리 육아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하는 의문과 기저귀 갈아 키웠다는 투의 대사는 <변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난 중학교 때였는데도 울어서 기저귀 갈고, 안아서 우는 아기 달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사진으로나 몇 장 남아있을 뿐이다. 헌데 마치 부모들이 하는 말처럼 "업어 키웠다", "기저귀 갈아 키웠다"는 말을 하길래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들도 한창 부모의 보살핌을 받던 나이일텐데?) 동생을 그렇게 키워본 일이 없는 오빠로서 친구들의 동생육아경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들은 그레고르처럼 가족을 부양하고 있기라도 했던 것인가?!


조부모는 부모의 위에 자리하고, 부모는 자식의 위에 자리하며 형, 언니, 누나, 오빠는 동생들의 위에 서는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가족모델.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그렇다. 상위에 자리한 사람일수록 권위를 가지려 하고 아래 사람에게는 존경심을 담은 복종이 요구된다. 그런 가족시스템에 익숙한 우리에게 군림하는 부모와 형제자매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나는 '업어키웠다'는 그 대사에서 수직적 가족구조의 상위에 자리했다는 그들의 위치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본인들에게는 자랑스런 경력일지 모르나 그로인해 군림하려 들 때 동생들에게 가해지는 권위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내리누름과 가족이라 하여 무엇이 다를까. 게다가 성적수치심조차 없었던 나약했던 시절을 희화화한 '기저귀 갈아 키웠다'는 말은 다 큰 동생들에게 매우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표현에 다름 아닐 거다. (난 차마 염치없어서 그런 말은 못하겠더라) 부모나 친척 중의 어른에게는 자신도 똑같은 폭력을 당하면서도 말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시인 이성복과 철학자 라캉을 통해 이 문제를 고찰했다. 가족이데올로기가 가진 폭력성을 은폐하려는 가족신화의 시도를 간파한 이성복의 시와 라캉의 고찰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수평적 관계의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가부장적 가족관계에 익숙한 우리가 카프카의 지적을 고찰할 수 있으려면 이와는 다른 즉, 수평적 관계인 '사랑'을 받고 알아야만 한다. 그 수평적 관계에서의 경험이 가족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자욱 떨어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강박관념에서의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라캉의 이야기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마저 참고하시면 되겠다.


이번 명절에 익숙했던 가족의 모습에서 그 내면에 자리한 이면을 보고 싶다면 카프카의 <변신>을 한 권 들고 가시면 어떨까 한다. 흔히 애증의 관계로 표현되는 가족관계의 여러 알력들의 새로운 면이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역시 중요한 것은 냉정하게 자기객관화 된 눈일 것이다. 누구네 집 딸이나, 누구의 형으로 규정된 그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그 관점으로는 아무 것도 보일리가 없다. 그저 남들에게 철들었다 한 마디 들을 수 있는 범부로 남을 뿐이다. 이 겁나면서도 떨리는 시도를 해볼 용기가 있을까.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둘러쌓인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이제 개개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