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럽게도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연이어 드러난 성범죄의 진상은 잔인할 뿐더러 엽기적이었다. 활자와 사진 정도의 시각적 전달수단만을 지닌 신문·잡지 등의 매체와는 다르게 영상과 청각효과를 전달할 수 있는 텔레비전은 강력사건의 보도에서도 더욱 강력한 전파력을 지니고 있다. 강력 성범죄의 용의자가 체포되면 수사 과정에서 필히 현장검증을 거치는데 이 장면에서 텔레비전의 진가가 드러난다. 범행현장에서 범행을 재현하는 용의자와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폴리스라인 밖에서 내지르는 분노한 시민들의 아우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대체로 텔레비전 뉴스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들이다.
"저게 인간이냐?"
"죽여라!"
"저런 놈은 아예 (성기를) 잘라버려야지!"
등등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격한 표현들을 내뱉는 시민들의 분노는 뉴스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된다. 분노와 노여움이란 감정이 전파를 타고 다수 대중에게 전달되면 게임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여론에 밀려 사법당국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을 어떻게 구워먹어야 가장 대중이 만족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원형경기장에서 검투경기를 벌인 두 검투사 중 어느 한 명이 쓰러지면 피를 원하는 대중의 열화와 같은 환호와 요구에 따라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로마귀족처럼 말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서두에 밝혀둔다. 이번 리뷰의 목적은 성범죄와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죄자를 옹호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전제를 깔고 흉악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는 것은 이 시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누구나 분노할만한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연이어 보도되는 가운데, 감정만으로 '쓰레기 같은 자들이니 다 죽여 버리자 (혹 죽여 버리면 어떠냐)'는 말은 순간의 분노와 인과응보적 보복심을 채워줄 지는 모른다.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는 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운영한 '삼청교육대'의 명분은 사회의 쓰레기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대중의 이런 심리와 감정을 이용한 측면이 크다. 감정에 따른 정책이나 법집행은 그렇게나 위험하다) 허나 가장 중요한 범죄피해자의 위로와 범죄 재발방지에 사형제도가 과연 최선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다. 보다 냉정한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흉악 성범죄에 관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요구한 형벌은 바로 '사형'이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은 바로 이 사형 제도를 주제로 쓰인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최근작 <제노사이드>를 통해 알게 된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일본 추리소설계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평가처럼 주도면밀한 구성과 탄탄하고 이지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일단,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뗄 수 없는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제노사이드>에서도 그랬듯이 작가는 단순히 작품을 미스테리물로만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작품의 주제와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 조언과 작가 자신의 치밀한 취재를 통해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메세지를 담아낸다. <13계단>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미스테리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물론 사회파 소설로서의 의미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사형 제도에 대해서 어느 한 편(사형 찬성 VS 사형 반대)에 치우쳐져 있는 독자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소신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 역시 작품을 통해 어느 한 편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반대쪽에 있는 생각이나 입장을 이해해 볼 수 있는 계기는 마련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스포를 금지하는 나름의 리뷰원칙(더구나 미스테리 추리물에야!)에 따라 내용 소개는 최소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 상 대략의 스토리와 인물 소개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3계단>은 교도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퇴직을 앞둔 '난고'와 상해치사로 2년간 복역하고 막 출소한 '준이치'라는 두 남자가 어떤 사형수의 무죄를 증명하려 나서는데서 시작한다. 이들이 무죄를 증명해야하는 '사카키바라 료'라는 남자는 사건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로 체포되어 사형이 언도되었고 불과 3개월 후의 형집행만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다. 난고와 준이치가 살인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드러나는 반전과 스릴러가 이 작품의 추리소설로서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작품 중간중간에 드러나는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언급은 사회파 소설로서의 의미를 더한다. 직접적인 언급 외에도 업무상 사형집행에 직접 참여했던 교도관 난고와 상해치사 피해자의 아버지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살인범 준이치의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에게 사형이란 제도가 무슨 의미를 갖고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에 대해서도 탁월하게 풀어낸다.
제목인 <13계단>은 한 사람을 사형시킬 때 필요한 '사형 집행 명령서'가 행정절차상 몇 개 계단을 거쳐야 최종 승인되어 형이 집행되는지를 암시하는 말이었다. 어떤 <13계단> 리뷰를 보니 사형수가 사형대에 올라가는 계단이 13개라고 써 놨던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소설에서도 '10개도 안되는 계단'이라고 직접적으로 명시가 되어있다. (일본에서-소설의 배경이 일본이므로) 사형 집행 기안서는 형사국, 교정국, 보호국 각 부서에서 각각 간부 세 명이 검토한 뒤 형사국으로 돌아가 '사형 집행 명령서'로 바뀌어 법무 장관 관방에서 비서 과장과 관방장, 사무 차관의 결재만 얻으면 최종적으로 법무 장관의 승인을 받아 사형이 집행된다. 즉, 13번의 결재를 거치면 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13계단'이다. (우리나라는 사형폐지국가가 아니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법무장관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아 사형선고는 있지만 형집행이 없는 실질적 사형폐지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13번째 계단에서 수백 장의 사형 집행 명령서가 멈춰있는 것이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범죄를 지어왔다. 그 처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을 적용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을 예로 들면, 이런 조항이 있다. '목수가 집을 짓다가 집이 무너져서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도 죽어야 한다' (헐 -_-;) 인간의 감정은 국가나 인종에 관계없이 보편적이었던지 한민족 최초의 국가라는 (고)조선의 '8조법'에도 동일보복원칙은 나타난다. 8조법은 그 중 3개가 전해지는데 그 첫 번째가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이다. 이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죄에는 마땅히 그에 따른 댓가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죄값을 치른다는 사실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도 하다. 강력한 처벌은 어느 정도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것만큼 큰 형벌이 또 있을까.
허나 죽음의 형벌인 사형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심지어 판결까지 내려지는데도 흉악범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교도소 안 어딘가에서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자신의 문 앞에서 멈출까 조마조마하며 떨고 있을지는 몰라도 살아는 있다. 그래서인지, 합리적 연관관계를 담보할 수는 없으나 겁먹을 것 없는 범죄자들은 여전히 '죽어 마땅한 죄'를 짓는다. 피해자는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분노에 찬 우리는 또 사형을 요구할 것이고 범인은 사형을 판결 받겠지만 죽지 않는다. 과연 형을 집행하기 시작하면 사형에 준하는 범죄는 줄어들까? 기대와는 다르게 지금까지의 인류사와 범죄학 이론을 살펴보면 '아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살인범죄는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있어왔고(물론 그 당시에도 살인죄는 사형), 이론적으로 외국의 사례를 찾아봐도 사형 제도의 시행과 범죄율 감소에는 큰 인과관계가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살인이나 유아 성범죄 등 사형이 마땅한 흉악범죄는 사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문 범죄학 이론에서는 강력범죄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생물학적 이론, 사회학습이론에서 낙인이론, 갈등이론, 맑스주의 이론, 페미니스트 이론 등 여러 이론을 제시했지만 어느 이론도 그 인과관계를 명쾌하게 규명해내지 못했다. (민수홍 외, <범죄학 이론>, 나남출판, 2008) 인간은 복잡한 성장환경과 과거기억, 감정 등을 가진 존재인 만큼 범죄의 내적동기를 딱 잘라 분석하고 예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면 무고한 피해자들의 유가족들과 강력한 사법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반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으로도 사형제도로 생명을 위협함으로써 겨우 통제하고 있는 잠재적 강력범죄마저 튀어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인류탄생 이래) 인간이 지은 죄를 처벌할 수 있는 가장 엄한 형벌은 뭐니뭐니 해도 목숨을 거두는 것이다. 쉽게 죽이는 것보다 끔찍하고 고통스런 죽음은 전시효과가 더욱 컸다. 과거를 보아도 주리를 틀거나(실제로 이걸 당하면 당한 사람은 다시는 걸을 수 없다던데 드라마에서는 금방 회복해서 걸어 다니더라), 사지를 찢는 형벌(거열형이라고 하며 이를 최초로 만든 진나라 재상 여불위-상앙이라고도 한다-는 이 거열형으로 처형됐다는 아이러니... 길로틴을 만든 길로틴이 길로틴으로 죽은 것과 비슷하다)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중국 등에서는 기름에 튀기거나 포를 떠서 죽이는 살벌한 형벌도 존재했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의 처였던 여태후가 고조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을 고조 사후 인간돼지로 만든 전례는 사형방법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태후의 아들로 고조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혜제는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정신을 놓은 채 요절한다) 근대적 사법형벌제도가 도입되면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과거의 형벌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럽게 죄수를 죽이는 방법들이었다. 문명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우리가 가진 복수심의 실체는 사실 여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강력한 보복심과 더욱 고통스런 처벌을 바라는 증오심이 잔뜩 묻은 그 마음. 현장검증에서 "죽여~~!!!"를 외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최소한 그렇게 들린다. 여기까지 오면 '이건 뭔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참혹한 피해를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피해자와 그 유가족을 지켜보게 되면 나 역시 생각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특히,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력성범죄나 살인사건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무너지고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온다. (실제로 내뱉기도 한다) 인간은 컴퓨터나 기계처럼 특정 알고리즘으로만 느끼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이 마땅한 범죄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형이 마땅한 범죄자들이 여전히 교도소에서 밥 잘 먹고 살아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한 번 분노케 한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딸을 납치·살해한 살인범이, 피해아이엄마인 전도연이 힘든 방황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 용서하러 간 면회장에서 "저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습니다"고 말했을 때 그 얼굴을 쳐다보는 심정이랄까? 이 정도가 되면 죽이고 싶다 못해 부숴버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왜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사형 제도를 갖추고서도 죽이지 못하는 가에 대해 원망하며 사법당국을 힐난할 것이다. 이게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네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다.
기껏 책 몇 권 보고 생각해봤다고 여기서 사형제도가 옳으냐 그르냐를 논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 문제에는 철학과 사회학 등 이론적인 문제 외에도 인간의 감정과 현실의 요소, 인권적 관점 등이 다양하게 엉켜있기 때문이다. 각 생각들과 입장의 차이는 첨예하고도 날카롭다. (이 문제를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나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를 앞에 두고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결정이란 생각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을 버린 인간을 죽음으로 처벌하는 판결은 이성과 감정의 그 어디선가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13계단>의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사형 집행 명령서를 지켜보며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용서는 가능할까? 인간의 큰 죄를 죽음으로밖에 처벌할 수 없는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우리 인간의 처지가 너무나 무능해 보이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 역시 아직 줄타기 중이다. (어려워 ㅠㅠ) 이제 함께 차갑게 생각해보고 뜨겁게 느껴보자. 결론은 없다. (결론은 신만이 가능할거야...) 답은 각각의 몫이다.
'끄적끄적 > 외국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쿄섬 - 기리노 나쓰오] 문명을 벗어난 인간의 나체를 훔쳐보다 (2) | 2013.05.16 |
---|---|
[변신 - 프란츠 카프카] 가족이라는 이름의 감옥 (2) | 2013.02.07 |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가장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자기고백 (10) | 2012.09.20 |
[제노사이드(Genocide) - 다카노 가즈아키] 인간다운 인간이기를 고민해 보았는가? (0) | 2012.09.13 |
[이유 - 미야베 미유키] 한국의 집은 미다스의 손인가? (0) | 2012.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