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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

[생각의 좌표 - 홍세화] 내 생각의 모태 찾기

내 전담 트레이너 선생님의 별명은 ‘pooh’다.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에 체격도 좋지만 실제 얼굴이나 분위기가 정말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pooh와 닮았다. 별칭을 참 잘 지었는데 실력 트레이너로서의 실력 역시 모자라지 않았다. 트레이너님이 운동 중에 문득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운동도 정확한 자세와 강도로 해야 효과가 납니다. 안 그러면 운동이 아니라 일이 돼 버려요. 그런데 운동 조금 해보신 분들은 잘못된 자세와 방법을 배워서 오세요. 그거 뜯어 고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회원분 지도해서 몸 만들어 드리는 게 훨씬 쉽습니다. 백지 같아서 그리기만 하면 금방 좋아지시거든요.”

 

비슷한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아마추어를 봤을 때, 프로는 난감함을 느낀다. 생초보라면 지도하는 대로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조금 안다는 아마추어들은 스스로의 관성에 젖어있어 지도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습관들을 바꾸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차라리 생초보가 낫다는 이야기를 한 거다. 운동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과 사고도 그렇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어디서 유입된 지도 모르는 온갖 고정관념과 생각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 그 생각의 파편들이 더미를 이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마치 내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 의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 출처불명의 레토릭에 놀아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 든 운동 습관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고정관념이던, 편견이던 뿌리 깊이 든 습관은 사고를 좀 먹고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한다.

 



생각의 좌표

저자
홍세화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09-11-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홍세화가 6년 만에 새 책 [생각의 좌표]를 펴낸다. [나는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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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는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내 생각 찾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리된 것이든 아니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는 우리 생각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한국사회구성원인 나의 생각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 2009, 한겨레출판, 5~6pp..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과 그저 막무가내로 욕을 내뱉는 것은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적어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사회 비판 못지않게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 못한 무차별 비난은 불만을 표출하는데 다름 아니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출신이 확실치 않아 자신도 모르는 신념과 의식들이 성숙한 비판을 낳을리 만무하다. 홍세화는 이 부분에서 사회에 대한 올바른 비판적 인식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한 뿌리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사회 비판의 좌표가 되는 ‘나의 생각’은 어디서 생성되고 왜 내 머리 속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나의 사유와 의식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런 물음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면 과연 나의 비판은 누구의 의견인지도 불확실하다. 앞서 말한 대로 내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나 의견들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들과 사회가 강요한 교육체계의 토대에서 차용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차용의 뿌리를 되짚어가서 비판적으로 다뤄보지 않은 이상 온전한 내 생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귀찮고 힘든 과정을 거친 뒤에라야 비로소 내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앞서 살아간 선배들과 홍세화가 조언하고 있다. (이런 게 멘토링이다. 500원짜리 동정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사람에게 지금의 시대와 현실은 생각할 거리를 너무도 많이 던져주고 있다. 동시에 시민 개개인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언론과 정부기관의 마타도어 역시 넘쳐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핵심인지 확신하기에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빅브라더들이 사유하지 않는 시민을 목표로 하듯, ‘대통합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오로지 경제성장과 안보불안의 외길만을 제시하는 바람에 건강한 비판의식과 문제의식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는 여전히 경제대통령을 지지하고 ‘잘 살아 보세’를 선택했다. 물신에 항복한 사람들은 그 선택의 대가로 소수를 억압하고 인간을 외면하는 불행에서 하루하루 신음하게 된다. 지난 5년을 겪어보지 않았던가.

 

멀었던 눈을 다시 뜨고 막혔던 귀를 다시 열어야만 다른 대안과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 혹은 비전이라고 말한다. 홍세화는 그 희망과 비전을 보는데 조금 앞서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것이 없고 그나마 있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한 개인이 이 땅의 시대에 조금만 앞서가도 엄청난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데서 조금의 슬픔을 느낀다. 허나 한 때 비현실적 포퓰리즘 정책이라 비난받았던 소수정당의 정책이 집권여당마저 공약으로 들고 나옴을 보면서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물신에게 잡아먹힌 듯한 이 사회가 때로는 인간회복을 위해 움직일 수도 있었던 것은 바로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홍세화 선생이 건네는 당부를 소개하면서 마치려 한다. 부디 물신의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아남기에 성공하시길!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 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 2009, 한겨레출판, 223~224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