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치른 직후다. 어찌어찌 원서를 쓰게 됐는데 말 그대로 소신지원만 했다. (철저한 방임주의자로서 "네 인생 네가 살지 내가 사냐"며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둔 아버지의 덕택이 크다) 아무개 대학 인문대의 면접을 보게 됐다. 교수 셋을 앞에 놓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풋내기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이 나라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나왔다. 면접이 끝나자 교수들이 "꼭 진학하도록 하게!"라며 큰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그 대학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십 년도 넘은 그 시절에도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공공연했다. 이제는 아예 위기라는 말보다는 퇴출이란 현실에 맞딱드린 인문학. 시장만능주의가 대학을 점령한지 오래된 지금, 인문학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어쩌다 전혀 상관이 없는 상경계에 진학한 내게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라는 제목은 꽤나 신선했다. 이대 최재천 교수가 유행시킨 통섭, 간단하게 '융합'이야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트렌드 아니었는가. 경제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란 꽤나 신선해 보였다. 숫자로 '과학'을 표방하는 현대 주류경제학은 인문학의 깊이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학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수학이 싫어 인문계로 진학했는데 대학에 와서도 미적분을 시키는 통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경제학과 따뜻한 인문학의 만남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사뭇 궁금해하면서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의 책장을 넘겼다. 설레임은 딱 거기까지였다.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모아 펴낸 책이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경제신문은 전경련 131개 회원사가 40%, 현대차가 30% 정도의 지분을 소유한 대표적 재벌신문이다. (나머지 지분도 삼성, LG, SK가 쥐고 있다) 대학시절 경제관 앞에 가장 많이 무가지로 뿌려졌던 신문도 바로 이 신문이다. 작년 TV토론에 나와 악명을 떨친 정 아무개 논설위원도 여기 계시니 찾아보시면 알 수 있다. 여기에 연재된 칼럼이니 기본적인 관점의 다양성이나 참신한 지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 책을 집필한 저자들은 KDI의 연구원이고 나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은 분이시니 컨텐츠의 퀄리티가 떨어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가 '인문학의 탈을 뒤집어쓴 맨큐의 경제학'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적 깊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경제학에서 다루는 많은 내용들이 인간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경제학이 태동하기 전부터 그러한 내용들이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를 쓰게 된 첫 번째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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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제학을 설명하려면 그에 앞서 경제학 공부가 왜 유용한지 납득시키고 어려워만 보이는 경제학에 흥미를 갖도록 유발해야 한다.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를 쓴 두 번째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김훈민, 박정호,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한빛비즈, 2012, 6~7pp.
저자는 이 책의 집필 목적으로 서문에서 위와 같이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로서 남긴 문학, 신화, 철학, 역사 등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과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데엔 이견이 없다. 또한 경제학보다는 인문학이 일반인에게 더 친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들의 지적은 옳다고 본다. 하지만 그 지적과는 달리 저자들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경제적인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역시 '경제학적'으로 인문학을 본다. 미국식 경제학을 사고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제학자가 수 천년 전의 역사와 철학, 가깝게는 수 십년 전의 예술까지 두루 살피며 그들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적절한 예를 찾아 헤매인 결과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과연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다.
3장 '책속의 인물들은 경제적으로 움직였다-문학 속 경제'의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악마의 제안-<파우스트>와 태환제도'편에서 이런 대목이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막대한 채무로 골치를 썩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대신들에게 헬리콥터 벤처럼 돈을 찍어내서 뿌리면 어떠냐는 유혹을 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옮겨놓고 그 중 재상의 대사에 등장하는 '태환(兌換)'이라는 단어 하나에서 태환제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환제도 하에서는 보관된 금화나 은화의 양만큼만 지폐를 찍어낼 수 있으므로 화폐의 마구잡이 발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태환제도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막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황제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보물을 근거로 화폐를 발행할 것을 권한다. 이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태환지폐이나 실은 불태환지폐를 발행하는 셈이었다.
궁내상과 재상의 대사만 보면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제국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하지만 이런 호들갑은 잠깐 동안의 환상에 불과하다. 메피스토펠렛에게 속아 넘어간 황제는 국고가 늘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향락을 일삼고, 그러는 동안 제국은 무정부상태로 변해버린다.
결국 괴테는 자신의 작품 <파우스트>를 통해 무분별한 화폐 발행의 폐해를 경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바이마르 공국의 경제문제를 담당하는 재상으로 일한 바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을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소산이라 보기는 힘들다. 영혼의 구제를 노래한 대작 <파우스트>에서도 경제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가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 김훈민, 박정호,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한빛비즈, 2012, 211~212pp.
괴테가 평생을 두고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에서 화폐남발을 통한 경제혼란사례를 찾아내 얻은 결론이 고작 '경제가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관계'라니. 이런 황당할데가 없다. 무분별한 화폐발행의 사례는 굳이 파우스트를 읽고 찾아볼 필요도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당장 벌어지는 실증적 사례가 아닌가. 이명박 정부가 벌인 4대강 사업이 각종 국채와 공기업 사채를 통해 '발행한 화폐'로 이뤄졌음은 만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헌데 굳이 인문학을 표방하고 파우스트로 들어간 것은 학자의 현실도피적 행각이었을까 아니면 순수한 인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실물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폐는 한갓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이미 17세기부터 금본위제니 은본위제니 하면서 화폐의 가치를 실물 금이나 은과 연동시켰던 것이다. 지폐를 들고 은행에 가면 실제로 그 가치만큼의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 주었기에 이를 태환화폐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으니 말도 안된다 할 지 모르지만 1970년 전까지만 해도 달러를 들고 가면 금으로 바꿔줬다. (엄청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한 40년 전에도 그랬단 말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세계 경제는 IMF의 설립과 함께 브레튼우즈 시스템으로 재편된다.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금-달러 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기본으로 하는데 어려운 이야긴 넘겨두고 일단 금-달러 본위제가 위에서 말한 '태환제도'다.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시절이었던 거다.
그런데 미국이 베트남전 개입 등 쓸데없는 재정지출을 늘리고 고정환율 때문에 독일, 일본 등에 치이면서 무역수지도 적자폭이 커졌다. (미국의 고질적인 쌍둥이적자는 이 때부터 왕성하게 발육하기 시작한다) 결국 미국의 달러가 엄청나게 풀리면서 미국이 보유한 금보유량을 뛰어넘는 훨씬 많은 달러가 유통됐다. 결국 1971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달러의 금 태환 중지'를 선언하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걸로도 안되자 1985년에는 정치적으로 일본과 독일을 압박하여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프라자합의를 강요하기도 했다.
다시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로 돌아오자면 정부의 쓸데없는 재정지출을 (실물이 동반되지 않는) 화폐발행으로 집행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당연한 거 아닌가. 화폐를 찍어낸다고 현실의 생산량이 늘지는 않지 않는가) <파우스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러다가 망했고, 현실 속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던 미국이 재정절벽에 눈물 흘리면서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저자들이 인문학을 통해 이 경제학적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면 단순히 '경제가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관계'라는 결론에서 끝나서는 안되지 않을까. (경제가 일상생활에서 함께 함은 애들도 안다. 지금은 애들이 경제를 걱정하는 시대다)
<파우스트>를 통해 배우셨다면,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졌던 폭발적 공기업부채 증가의 원인을 밝히고 비판하는, 정권이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국채발행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칼럼을 쓰셔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한국의 화폐라는 것이 불태환화폐로서 특히 국공채는 국민의 땀으로 만들어지는 세수를 담보잡아 발행하는 '국민세금담보 화폐'인데 이 불태환지폐를 마구 찍어내겠다는 사람들은 메피스토펠레스에 속아 넘어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대신들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지... 우리도 이대로 가면 멀지 않은 이야기다. 학자적 식견으로 진실을 봤다면 소신을 가지고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저자들의 말처럼 '백성을 기만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제가 지배하는 시대다. 한국에서는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에 이어 아버지의 '잘살아 보세' 신화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런데도 비보는 끊이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 추운 겨울날 차디찬 철탑 위에 목숨을 걸고 올라가서 농성중이고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아픈 몸을 창 밖으로 던져 목숨을 포기한다. 심지어 난방비를 아끼겠다고 보온을 하지 않고 주무시다 유명을 달리한 어르신도 있다. 먹는 거, 입는 거 좀 걱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며 선택한 권력들은 하나같이 국민들을 배반하고 있다. 여기에 소위 전문가라는 배운자들의 곡학아세가 국민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나팔수들은 멋지고 화려한 영상과 사진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상생과 공존이 아닌가.
다만 문학과 철학에서 작은 저항의 움직임은 여전하다. 재야에 묻힌 철학자들은 조용히 시대의 암울을 밝히고 있고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의 작품으로 오늘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다. (심지어 송경동 시인처럼 활동하다가 투옥되는 인물도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인문학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봤을 때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사뭇 궁금하다. 인문학을 빙자한 어용경제학의 나팔 소리에 분노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학이 구축한 아름다운 논리의 틀을 벗어나 우리 곁 현실의 인간을 바라볼 때, 저자들이 말했던 인문학과 경제학의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장을 덮었다.
*태환화폐와 브레튼우즈 시스템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다.
최영순, <경제사 오디세이>, 부키, 2002
쑹훙빙, <화폐전쟁>, 랜덤하우스, 2008
정운찬, 김홍범, <화폐와 금융시장>, 율곡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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