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끄적/한국문학

[청춘 파산 - 김의경] 당신이 먹고 있는 그 햄버거, 누가 만들었을까요?




청춘 파산

저자
김의경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4-03-0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파산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신예 작가의 출현!20대에 신용 불...
가격비교


내 알바데뷰는 수능시험이 끝나고 했던 '켄터키 할아버지 치킨집' 알바였다.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인자한 얼굴로 치킨통을 들고 있는 모습.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어서오세요 XXX입니다~!!"를 외치고 있는 또래들의 모습. 거기에 혹 끌려서 알바를 하겠다고 걸어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인자해 보이는 영감탱이가 고작 일한 지 한 달도 안되는 10대에서부터 고작 스물 몇 살 먹은 어린 친구들을 부려서 무려 100년 전통의 치킨을 튀기고 있다는 사실을. 산뜻한 유니폼은 사실 조악하기 그지없는 옷이었으며 그 옷에는 각종 양념찌꺼기와 땀이 진하게 배여있었다는 사실을. 겉에서 보기와 다르게 실제의 현실과 맞부딪힐 때, 현실은 냉혹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워가던 시절이었다.


내 20대를 오롯하게 채워낸 '알바'라는 녀석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가 변해가는 모습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이었다. 영어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Part-time job이란 말을 제쳐두고 굳이 독일어인 Arbeit라는 말을 차용할 것만 봐도 한국의 '알바'는 분명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단시간 노동이 필요할 경우 XX몬, XX천국 같은 알바구인구직사이트를 통해 언제든지 손쉽게 수급할 수 있는 사업의 원료 정도로 치부될 정도로 보편적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심지어 주로 10~20대가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패스트푸드점 알바나 주유원 아르바이트에 50~60대가 가세하여 경쟁하는 현상을 보자면 이제는 알바도 엄연한 하나의 직업군으로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제2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인 <청춘 파산>은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백인주의 이야기다. (정규재 논설위원께서는 다행히 심사위원에서 배제되셨나보다) 사실감있는 묘사의 재료로는 저자의 경험이 적지 않게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저자 자신은 스스로의 경험과 더불어 같이 알바를 했던 수많은 동료들의 이야기가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말도 안되는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생존도, 사랑도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밖에 없는 희망없는 청춘들의 이야기. 알바 한 번 안해본 사람 어딨냐고 할 지는 모르지만 왕년에 꽃병 한 번 안 던져본 사람 어딨냐는 허풍처럼 생존의 문제를 위해 알바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청춘 파산>이 주는 메시지의 현장감과 절박함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청춘 파산> 속의 백인주가 빚쟁이와 사채업자들에게 쫒기며 소위 '프리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가족이나 형제, 친구의 잘못도 아니다. 각종 깡과 부동산으로 탐욕의 대열에 합류했던 백인주의 엄마는 금융실명제 실시와 함께 당좌수표와 가계수표의 부도로 몰락한다. 그 사이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마치 백인주의 집이 몰락했던 것처럼. 이미 엄마가 딸의 명의로 급전까지 당긴터라 이후의 백인주는 그야말로 도망의 삶을 살아간다. 직장을 잡아도 사채업자와 기도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프리터로 살 수밖에 없던 백인주.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뒤 자의로 타의로 그녀를 떠나간 남자들을 잡을 수 없었던 것도 끊임없는 협박과 고소를 함께 견뎌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젊음도, 사랑도 하나하나 그녀를 떠나간다. 얼마되지 않는 알바비는 먼지처럼 가라앉았다가 삶의 무게에 가벼이 날아서 사라지고 만다. 이 괴로운 운명이 누구의 책임인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불행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짓누른다.


<청춘 파산>은 분명 소설인데 읽고 있다보면 르포르타주인 <인간의 조건>의 오마쥬가 떠오른다. <인간의 조건>이 꽃게잡이배, 비닐하우스 농사, 돼지농장 등 하드코어형 알바체험 보고서라면, <청춘 파산>은 데생모델, 편의점, 고시원총무 같은 소프트형 알바체험 보고서라는 점이 다를 뿐. 하지만 소프트형이라고 해서 편한 알바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알바 중에 '편한 것'이란 없다. 그런 알바가 있다면 알음알음으로 이미 다 채가고 난 뒤고, 알바사이트에 올라온 것들은 그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3D'가 대다수일테니. 우리가 휴일에도 편의점에 가서 Convenience하게 상품을 구입하는 것은 법이 정한 휴일까지 반납하고 근무하는 알바생이 가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독자라면 감히 '편한 알바'같은 소리는 하지 못할거다.


실상 한국 산업계의 가장 밑바닥에는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자 외에도 알바라는 청년 숙주가 존재한다. 날이갈수록 번창하는 커피전문 프랜차이즈나 패스트푸드점, 제과점, 피자전문점,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 빙수전문점 등등 이름만 대봐라. 그 어느 곳에서 청년 알바를 고용하지 않고 돌아가는 가게나 산업이 있는지. 알바들이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 다양한 분야의 프랜차이즈업들이 알바하는 청년들의 젊음과 저임금을 숙주삼아 운영된다. 미국에서 이미 햄버거의 왕으로 등극한 뒤 한반도를 정벌하러 온 한 패스트푸드 체인의 세트메뉴는 그 메뉴를 조리하고 만든 알바생의 시급보다 한참 비싼 가격을 요구하고 있다. 각 매장에 유통과 식자재납품을 독점하는 프랜차이즈 본사는 심지어 로열티까지 챙겨가니 말 그대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벌어가는' 꼴이다. 알바비를 떼어먹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니 이쯤되면 '재주 넘은 곰의 쓸개에 빨대를 꽂은 경우'인데 이것이 과연 너무 심한 비유일까.


<인간의 조건>의 저자인 한상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악의 근원이 이런 모습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에게 들어가는 돈을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말이다."



오늘 우리는 여객선에서 꼬박 2박 3일을 아르바이트하고 11만 7천원을 벌려다가 사망한 아이들이 선원이냐 아니냐, 장례비를 주냐 못주냐를 두고 다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최소한 갖추어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는 법률적인 근로계약과 회계적인 지출내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비단 이번 사건 뿐만이 아니다. 툭하면 위기론과 실적악화를 들고나온 사람들은 스스로의 경영실패책임을 지기에 앞서 정리해고방침부터 발표한다. 정리해고가 '사람 잘라서 인건비 줄이고 그 돈으로 적자 안났다고 둘러내기'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엉뚱하게도 경영실패의 책임을 나눠지고 옷을 벗는 아이러니는 자영업자를 대량양산하더니 이제는 중년알바생까지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 이 끝없는 노동절감 프로세스의 끝에서는 마침내 모두가 알바생이 돼 있을까. 그 때는 아마 '청춘 파산'이 아니라 '인간 파산' 선고가 내려졌을 즈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30여종 이상의 알바를 섭렵한 알바달인 백인주 선생이 전하는 알바고르는 원칙을 옮겨본다. 백인주의 입을 통해 저자가 직접 전하는 메시지 중에 가장 새겨들어야 할 충고가 아닌가 싶다. 오늘도 알바의 현장에서 땀흘리고 있을, 그리고 알바를 구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래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경구는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 고생한다'로 바뀐지 오래다.


나에겐 나만의 알바 수칙이 있다. 첫째, 잠은 밤에 잔다. 따라서 밤에 하는 일은 무조건 거절이다. (가발 가게에서 일한 이후로 이 수칙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둘째, 몸을 상하게 하는 알바도 절대 금지. 건강을 해치면 돈이 배로 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칙으로 인해 술 따르는 직업은 당연히 내 알바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몸을 함부로 굴리면 안된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몸을 파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여부도 모르겠다. 다만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할 위험이 있는 일에는 뛰어들지 않는 것뿐이다. 술 따르는 것뿐 아니라 먹기 대회에도 절대 안 나간다. 1등해서 상 타면 뭐하나. 위가 늘어나 두고두고 고생한다.


한 때 매력을 느꼈던 네일아티스트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나의 병적인 노파심 때문이다. 친구에게서 네일아티스트와 치과 의사는 에이즈 감염에 노출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가슴속에 두려움이 자리잡았다. 위험한 배달알바 같은 것은 여자라서 써 주지도 않겠지만 절대사절.


하지만 이러한 확고한 알바 수칙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험한 아르바이트로부터의 유혹에 흔들린 적이 있다. 2박 3일에 50만원! 이름하여 지금은 널리 알려진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 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수많은 지원자들과 대기실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기니피그가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을 바꾸었다.


- 김의경, <청춘 파산>, 민음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