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리뷰는 스포가 유달리 많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스타들을 '자살'로 잃었다. 아직도 사랑받는 명곡들을 남기고 떠난 가수 고 김광석을 비롯,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였던 고 최진실과 그의 동생 고 최진영, 스크린을 수놓았던 여배우 고 이은주, 고 장진영 등 쟁쟁했던 스타들이 우리를 뒤로 하고 떠나갔다.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스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뒤늦게 그들의 이면을 발견하게 된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문제들과 고민들로 번뇌했던 스타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쓸쓸했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독이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여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스스로를 '쿨하다'고 말하는 것이 자랑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쿨하다'는 이 괴상한 표현은 외래어도, 우리말도 아닌것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대개 감정적으로 질척거리지 않고 관계의 맺고끊음이 분명하며 내면적으로 쉽게 상처받지 않는 스스로의 태도를 빗대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스스로가 '쿨하다'는 젊은세대의 자신감은 그의 말이나 행동 등 외면적인 부분에서는 확실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쿨하다던 젊은이들의 미니홈피나 SNS에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호소하는 글이 넘쳐난다는데 있다. 쿨하다던 말이 무색하다. 흡사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무대 뒤에서는 홀로 쓸쓸했던 스타들의 모습같다. 인간적인 고독을 'Cool'이란 단어로 포장하려 했지만 실상은 그냥 '외로웠던' 것이다.
<모던 하트>는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쿨하다'는 허세 아래 메말라 가는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김미연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해 보이는 직업인 헤드헌터로 일한 지 3년차인 37세 싱글녀다. 이야기는 미연의 일상을 중심으로 잔잔하게 진행된다. 어떤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대도시생활에 익숙한 20~30대의 삶과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일, 사랑, 가족 등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물질과 스펙이란 기준이 장악하지 않은 곳이 없는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주인공 미연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끊임없는 저울질의 연속이다. 그것은 비단 미연 만의 계산법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30대의 대다수가 선택한 인간판단의 기준이다.
태환은 그날 참가했던 50여 명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일단 눈에 띄게 키가 컸고, 길고 가는 얼굴에 날렵하고 높은 콧대, 살짝 긴 듯한 머리가 순정 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프로필도 착했다. 국내 제일의 사립대학이라 불리는 Y대를 졸업한 뒤 미국계 유명 핸드폰 제조업체인 H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 태환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자 내 주가가 상승했는지, 아니면 내가 자신감이 생겨 괜히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후부터 사람들은 내게 호의를 보이며 먼저 접근해왔다.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누가 봐도 번듯한 태환의 반대쪽에는 별명조차 우스운 '흐물'(본명은 정경훈이다)이 있다. 미연 마음 속의 저울은 태환과 흐물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흐물은 키가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했다. 누가 뭐라고 말만 하면 커다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럴 때마다 가늘고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나 피부색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낮은 콧대만 아니었다면 꽤 봐줄 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얼굴이었다. 말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말할 때 침을 튀기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말을 시작하면 서둘러 먼 거리로 이동해갔다. 글을 멋들어지게 잘 쓰고, 시구 인용하기를 즐겼으며, 직장이 대전인데도 서울에서 모임이 있다 하면 총알처럼 날아왔다.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남자들의 외모, 스펙과 연봉, 출신대학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미연은 사실 전문대 출신이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그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스펙을 가진 남자들을 비교하고, 헤드헌터라는 직업 때문에 업무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미연. 그녀는 가끔 일상과 편견의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를 잊고 지내지만 높아진 조건과 스펙요건에 스스로도 상처받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보잘 것 없는 출신대학 때문에 미연 역시 학벌에 의한 차별에 의문을 갖지만 그녀에게는 이를 타파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다. 그렇게 미연이 포기하고 순응하는 동안 그녀 옆의 A, B, C들 역시 그렇게 포기하게 되고 이 사회의 거대한 학벌 카르텔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비명문대 출신 99%가 1%의 명문대 출신을 위한 학벌주의을 조성하고 인정해주는 시스템은 그렇게 확대되고 유지된다.
"출신대학을 왜 그렇게 따져요? 일만 잘하면 되지. 희한한 사람들이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최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미연 씨가 아직 대한민국을 모르는구나. 대한민국에서 출신대학은 낙인이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 경력 좋고 대학원 좋은 데 나와봐야 아무 소용없어. 대학을 좋은 데 나와야지. 학부를 좋은 데 안 나온 사람은 절대 A급이 못 돼. 외국계 회사도 정말 인지도 높은 회사는 사람 뽑을 때 출신대학 다 따져. Z사 봐. SKY 출신 아니면 아예 이력서도 보내지 말라고 하잖아? 서울대 대학원, 아니 하버드 대학원 나와도 대학 좋은 데 안 나오면 다 꽝이라고."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평균적인 대한민국 사람들의 시선을 대변한 최 팀장의 말에 좌절하는 것은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넣은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가 좋은 인재를 골라서 비교하고 추천해서 먹고사는 헤드헌터 미연 자신이다.
내 최종 이름값은 '전문대 졸업'이 아니라 '헤드 앤 코리아 재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이준상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체 이때까지 세상에서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수치심으로 얼굴이 홧홧거린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니다가 들킨 기분이 이럴까.
....
나는 "그 사람 OO대학 나왔잖아요. OO사에 이력서 못 넣어요" 같은 말을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다. 사이버 대학을 나온 주제에 다른 사람이 나온 대학을 놓고 왈가왈부하다니.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미연이 고백한 내면의 수치심은 미연 만의 것이 아니다. 속칭 지잡대를 비롯 비명문대 출신이 대다수인 이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씻을 수 없는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개인의 발전 의지와 욕구를 자극하고 성취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끌어낸다는데서 일정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학벌이나 성별, 출신 지역 등이 높은 벽을 치고 이들의 진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면 열등감이 좌절과 분노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성 밖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그 문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조건부 입구다. 좌절한 사람들은 이제 성 안 사람들과 끈이 있다는 것이라도 자랑삼기 시작한다. 이 기묘한 현실타협의 선택 역시 배타적 학벌주의와 스펙 중심의 인간관을 더욱 공고히 다져준다.
엄마에게 제부는 일종의 로망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전교1등 자리를 내주지 않던 세연이 서울대에 못 가고 K대에 가게 되었을 때부터, 엄마는 사위라도 서울대 나온 사람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서울대 사위. 세연의 결혼 초기, 엄마는 제부를 대놓고 이렇게 불렀다. 창피하다고 세연이 아무리 말려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미연의 제부는 서울대 타령을 하던 엄마의 성원에 힘입어 무위도식 하지만 명절을 끝으로 그도 끝나버렸다. 실체가 없는 공허를 좇던 엄마의 허영심에도 끝이 있음을 미연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실체를 보지 못하고 허영을 좇고 있는 것은 미연 자신이다. 엄마가 했던 그대로, 미연 역시 같은 선택을 하고 만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편견과 관습적인 기준은 단기간에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우울해 하던 미연을 위해 흐물이 대전에서 5시간이나 걸려 서울 대학로로 날아온 그 날도 그랬다. 싸리눈이 내리던 그 날, 흐물은 무대 위에 선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가림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공사 전 마로니에공원 한 구석에 있던 TTL 그 무대 말이다. 미연을 위한 흐물의 열정적인 춤을 감상하던 미연의 휴대폰에 태환의 전화가 걸려온다.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태환에게 마로니에 공원으로 오라고 해도 달려올 분위기였지만, 그에게 흐물과 있는 장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서울대병원 건물 알죠? 그 건물 뒤편에 건영 빌딩이라고 있거든요. 거기 지하, '장밋빛 인생'으로 오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무대로 올라갔다. 가늘던 눈발이 어느새 굵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디 가는데?"
흐물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렇게 물었다.
"...... 후보자 만나러."
"이 시간에?"
그동안 흐물을 따돌리기 위해 후보자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수없이 댔지만, 흐물이 반문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응."
밤 11시에 갑자기 후보자를 만나러 가다니,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제약회사 메디컬 어드바이저 포지션이 들어왔어. 그 자리 후보자가 서울대병원 의사야. 그 사람이 밤에 잠깐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너랑 약속 장소도 대학로로 잡은 거야."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말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후보자 만나는 거 30분이면 끝나지?"
헉. 흐물이 급소를 찔렀다. 후보자와의 인터뷰는 대부분 15분에서 20분, 길어야 30분이다. 얘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지? 골치 아프게.
"흐물, 내일 출근 안 해? 지금 밤 11시야. 서울역 막차 시간 넘기 전에 얼른..."
"서울역 막차는 벌써 떠났어."
흐물의 시선은 내 등 뒤를 향해 있었다. 뭐가 있나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빠른 속도로 땅에 꽂히는 눈발 뿐이었다.
"그럼 터미널로 가. 고속버스는 좀 늦게까지 있잖아. 나 간다. 눈 오니까 빨리 집에 가."
나는 얼른 공원 입구로 뛰어갔다. 부담스러운 흐물의 눈빛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미연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흐물이 큰 소리로 외쳤다.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태환의 갑작스런 호출에 미연의 머리 속은 태환으로 가득차 버린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미연에게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그녀의 독백에서도 궁색한 자기변명만 늘어놓을 뿐, 솔직한 그녀의 생각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이전에 밝혔던 그녀의 생각들과 행동들에서 '~일 것이다'는 정도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미연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기다리겠다던 흐물을 잊고 그 날 밤 태환과 엉망으로 취해버린다. 이후 흐물은 미연의 연락을 피하고 얼마 뒤 미연도 알고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렇다면 그날 밤 태환을 선택해 갔던 미연은?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내 손에 있던 CD를 쥐여주었다. 차갑고 건조한 손. 나는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저 손이 나를 쓰다듬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다. 기대했던 행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바람이 실현된 적도 있었다. 나, 이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 밤에 흐물을 마로니에 공원에 혼자 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생이란 그런 것. 진행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경각심이 든다면 그것은 파국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완전한 격정과 놀라운 속도, 그리고 이전의 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떤 일탈이 혼연일체를 이룰 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완성된다. 원인과 과정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인연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태환이 자신의 짝이 될 수 없음을 느낀 미연은 그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나오며 생각한다. 외모, 연봉, 학벌, 집안, 스펙 등등 가려볼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려보며, 심지어 자신에게 순정을 바친 흐물까지 버려두면서 선택한 태환에게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 미연은 '쿨하게' 돌아선다.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인다. 순식간에 다가온 실망과 좌절을 그런 식으로 정리한 미연은 마지막에 "굉장히 세련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후가 어찌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그녀의 말로 미루어 봤을 때, 그리 밝게 느껴지지 않는다. 쿨한 척은 했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열등감과 수치심에 치를 떨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영심을 달래기 위해 또다시 자신을 배신한 조건들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유독 나라서 그럴까.
미연이 고독한 채로 남게된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스스로의 탓이다. 미연 자신에 해당하지 않는 조건들로 타인을 평가하고 그렇게 관계를 맺고 선택했던 행동들이 다름아닌 미연 스스로를 소외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일상을 지배했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못한 미연에게 주어진 몫이란 남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연기하는 조연의 삶 정도였다. 리뷰를 읽는 독자들 중에 미연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동질감을 느끼는 분도 계시지만, 불쾌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허나 책장을 덮고 나서 돌이켜보면 마냥 미연을 미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연의 직장생활과, 가족모임, 사랑과 연애, 결혼, 친구관계,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영화 속 당당한 캐리어우먼의 그것이 아니라 일상에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미연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미연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사회는 물론, 개인과 부부, 형제, 심지어 부모자식 관계에까지 파고든 오늘을 살고 있다. 그것은 경제공동체를 넘어 정서적 안정과 사회안전을 보장했던 과거의 가족공동체가 해체됐음을 의미한다. 이제 각 개인은 홀로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각각의 관계에서 신뢰란 보여지는 것에 의해 판단될 뿐이다. 그래서 서로 간에 관계를 정립할 때 중요한 요건은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해놨느냐"에 맞춰진다. 담보를 잡지 않고서는 신뢰를 줄 수 없는 삭막한 '관계'거래의 현장에서 소외받고 쓸쓸해지는 것은 각 개인들이다.
대학 졸업해서 이제 갓 취직한 26살 사회초년생 아가씨가 그런다. (몇 개월 인턴생활한 29살도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나이를 먹었으니까... 능력을 보구요 어쩌구 저쩌구" 26살. 적지 않은 나이기는 하지만 이제 막 학생 딱지 뗀 사회초년생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이다. 적당히 평균적인 남의 이야기 듣고 무비판적으로 가치화 시킨 듯한 혐의가 짙다. 이 아가씨의 뒤에서 37세 미연의 오마주를 보았다. 미연이 그랬으니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조로早老하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조건에 의하면 스스로가 얼마짜린지는 둘째치고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인식을 하는 만큼 인생의 무서움, 사람의 무서움, 세상의 무서움을 알고 있지는 못해 보인다.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37세 사회경력 10년이상 싱글 미연 언니'의 말을 옮겨본다. 인생, 겨우 그거 해보고 나이타령 할만큼 간단하지 않다. 쉽지도 않다. 화려했지만 쓸쓸히 사라져갔던 스타들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조건을 좇던 미연처럼 인생의 소중한 시절을 낭비하지 않기 바란다.
이. 십. 대. 그 단어를 나직이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 내게도 20대가 있었지. 마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육신은 어느새 20대를 훌쩍 뛰어넘어 낯선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른일곱. 아무리 되새겨도 늘 낯선 나이. 3년 뒤면 나는 마흔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흔. 그 때 나는 어떤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까. 서치펌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여전히 싱글일까. 지금처럼 흐물 같은 남자나 만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나이 먹기가 두려운 것. 그래서 인류가 수천년 동안 행해온 공고한 관습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것. 차라리 차악을 택해 무시무시한 세월을 덮고 건너가는 것.
- 정아은, <모던 하트>, 한겨레출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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