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TV화면에서는 귀향길에 오른 단란한 가정의 인터뷰를 내보내고, 고향에서 자식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늙으신 부모님을 화면에 그린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각자의 부모와 고향을 향해 대장정을 떠나는 모습은 시각적으로 애틋하게 연출돼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딱 거기까지다. 그 아래에 잠겨있는 이야기는 수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의 관계를 맺어왔음에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부모와 자식, 형제는 의례 관습처럼 고향을 찾았지만 서로의 서먹함에 불편함을 느낀다. 가족 구성원 서로가 가족 내의 역할로만 상대를 인식할 뿐, 한 사람의 인격이나 욕망으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나 역시 꽉 막힌 고속도로 한 켠에서 새로 장만한 전자책 리더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명절이나 돼야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부모님이기에 특별히 다른 목적은 없었다. 오히려 길위에서 보낸 시간과 소재가 떨어져 더이상 이어지지 못한 가족간의 대화 후 남는 시간들이 많았기에 '못 봤던 책을 실컷 읽겠다'는 다소 엉뚱한 목적만 달성할 수 있었다. 몇 마디 하시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연방 담배 연기를 뻐끔대던 아버지의 작아진 어깨를 보며 박범신의 <소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리더기에는 <소금>이 다운돼 있었다.
<소금>은 젊은 층에 영화 <은교>의 원작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박범신이 <한겨레>에 연재한 소설 <소금>을 갈무리해 출간됐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연재된 소설이 한겨레 누리집에 올라와 있으니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책을 구입하기 어려운 독자라도 한 번쯤 읽어볼 수 있다. <은교>에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벌로 얻은 것이 아니다"는 대사를 넣은 것처럼 작가 박범신은 '늙음, 나이듬'에 관한 성찰과 의문을 소설로 풀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소금>도 역시 그러하다. 십수 년을 남편과 아버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희생을 요구받았고 묵묵하게 수행했던 초로의 남자 '선명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그렇다. 박범신의 문제의식은 '작가의 말'에 나온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융숭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작가의 말' 중
이것은 하얀 피부 위에 물결치는 보드라운 솜털을 반짝이며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한 잔에 5천원이 넘는 커피를 홀짝대는 그 자녀들을 키워낸 아버지들의 질문이다. 말주변도 없고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해봤자 '말 안 통하는 늙은 아저씨'쯤으로 취급받는 '백치 아다다' 아버지들을 대변해 소설가 박범신이 제기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우리는 배우고 늙었을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잠언은 틀린 말이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 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문제의 잠언은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고 바꿔야 마땅했다.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돈 만 원에 의가 상하고 서로 다투는 이 각박한 시대에, 무엇이 십수 년간 고되고 지리한 노동으로 (새누리당이 무척이나 헐뜯는 '무상'으로)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를 강요했을까. 분명한 건 거의 본능으로 각인된 이 고단한 삶이 젊음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저 청춘들을 키워낸 눈물의 옥토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옥토는 이제 옥수수나 감자조차 키울 수 없을 만큼 메말라 버렸다. 기름진 옥토가 열매를 맺는 것이야 자연의 섭리라지만 한 사람 삶을 놓고 봤을 때 그의 희생이 다음 세대의 누군가에게 아무 대가없이 고스란히 자양분이 된다면 이것은 과연 공정한가.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소금>에 등장하는 아버지 '선명우'도 반평생을 아내와 자식을 위해 헌신했다. 부자집 딸이었던 아내와 그 아래서 자란 세 딸이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인 소비에 열중할 때 그는 아무 불평없이 뒷바라지 하던 남자였다. 그리고서도 큰 소리 한 번 치지 못하고 아내와 딸들로부터 바보취급을 받지만 그마저도 웃어 넘기는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막내 딸 시우의 생일날 홀연히 사라진다. 선명우가 죽을 힘을 다해 지탱했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다. 이야기는 선명우의 딸 시우와 그와 운명적으로 만난 시인이 아버지 선명우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둘은 애타게 찾던 '아버지 선명우'가 죽었고, '인간 선명우'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작가는 단순히 '예의없는 젊은 것들'을 향해 혀를 차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가족과 가정,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국가, 제도 등을 향한 통렬한 비판의식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쇼핑의 달콤한 맛으로 가족을 이간질 시킨 자본주의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비 문명이 아이들과 그를 끝없이 이간질 시켰다. 어떤 개인도 그것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아비가 빨아 오는 단물이 넉넉하면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고 그 단물이 막히면 가차 없이 해체되고 마는 가정을 그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아버지가 실직하면 가족이니 더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해체였다. 그는 그래서 가끔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개입했다면 달라졌을까, 저 거대한 문명에게 어떤 개인이 맞장 뜨는 게 과연 가능한 세상일까 하고.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단순히 돈을 벌어와 가정의 물적토대를 유지하는 것 말고 오늘날의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 아버지들은 그래서 외롭다. 그리고 쓸쓸하다. 한 때는 꿈을 품은 젊은이였고 울고 웃으며 자신을 사랑했던 한 남자는 거기에 없다. 그는 죽은지 오래다. 그는 자녀들의 분유값과 기저귀값을 걱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스스로의 관에 못질을 한 뒤 거기에 누웠다. 껍데기만 남은 그는 다 큰 자식들과 늙은 아내의 지청구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집에 오면 입을 다물었고 들어오기 전에는 소주 한 잔을 입 안에 털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간악한 자본주의의 사주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마저도 다른 아버지, 남편과 비교당하며 폄훼당하기 일쑤였다. 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외롭다"였다.
모든 문제는 잉여 재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잉여는 소비를 부르고, 소비는 더 큰 욕망과 더 큰 잉여를 부르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가난해서 아내와 딸들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저축이 늘어나면, 아파트를 늘리면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죽어라고 일해 과장, 차장, 부장, 상무에 오르고, 그렇게 해서 늘어난 연봉, 늘어난 잉여 재산이 가져온 건 사랑의 황폐화뿐이었다.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가족을 버리고 자신을 되찾은 선명우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과 가족을 이룬다.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 아귀같은 아내와 자식들의 먹이를 따오려고 스트레스와 폭근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한다. '소금'은 그 단초였다. 젊은 날의 첫사랑도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온다. 그랬다. 아버지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누군가와 사랑을 했으며 노동의 고통에서 신음하기도 하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던 거다.
이번 명절은 각자 어땠는지 모르겠다. 마치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처럼 웃음꽃이 피고 아버지가 '당연히' 명절음식준비 등에 나서는 '행복한 가정'이었다면 <소금>은 그리 와닿지 않는 소설일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에게 <소금>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슴 속 어딘가의 이야기로 은밀하게 와닿는 작품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엄친아, 엄친딸처럼 소위 '행복한 가정'보다는 명절 스트레스에 서로 다투는 부부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잔소리와 반항으로 시끄러운 것이 보다 현실적인 가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 또 장면에서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는가? 껍데기로 남은 권위조차 조롱거리로 전락한 이번 명절에 우리의 아버지는, 신경숙이 그린 엄마만큼이나 (어쩌면 더) 쓸쓸해 보인다. 마치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썼는지 박범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통해 명절에 만나뵌 아버지의 슬픈 웃음을 곱씹어 본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땠는지.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야!"라고 어떤 자식들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별로 한 게 없어!" 그렇게 말하는 자식들 중에는 성년을 넘긴 자식들이 오히려 많았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부부도 있었고, "다 저쪽 패거리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이쪽 패거리도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대고 손가락질해야 하는지 잘 판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체제가 기획한 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생산력과 소비라는 이름의 거대한 터빈 안에서 불안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단맛은 필연적으로 이를 썩게 만들었다. 소비구조가 자식들에게 분별없는 빨대를 쥐어주고, 체제가 안방에 들어와 부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세계가 집안에 끼어들어 형제를 갈라놓는 건 누워 식은 죽 먹기였다.
-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 2013
<표백>으로 제16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 장강명은 신작 <뤼미에르 피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절대선이나 구원자가 있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보다는 체계는 없더라도 사람 사이의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게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장강명, <뤼미에르 피플>, 한겨레출판, 2012, 328p.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도, 알라도, 부처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주위가 되고 환경이 돼서 천국을 만들 수도, 연옥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아버지를 구원할 수 있는 인정과 연민을 지니고 있는가.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보내버린 그에게 우리 젊은 자식들이 대답할 차례다. 그대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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