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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한국문학

[열외인종 잔혹사 - 주원규] 웃픈 대한민국의 리얼 우화




열외인종 잔혹사

저자
주원규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09-07-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욕망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1996년 한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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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이나 강남, 홍대처럼 사람이 몰리는 곳은 누구나 한번쯤 가봤을 것이다. 그 북적임과 사람들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한 곳에 멈춰 있어보면 참으로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많은 사람 중에도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각각의 생김새는 물론, 옷차림과 행동거지 등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천차만별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사람을 하나의 완전한 우주로 본다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단순히 외양만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주위의 누군가를 떠올려봐도 각각의 사고방식과 생각들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목적이며 덕목이라고 배운다. 물론 이런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는 관념에만 머물 뿐이다. 현실에 내놓인 우리는 이런 이상이 항상 정반대로 펼쳐지는 일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다양함이 인정받기보다는 가방끈과 대학간판, 외모, 재산 등 손가락에 꼽는 기준에 의해 순위가 매겨지고 그에 따라 대우를 받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다.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기서 낙오한 '열외인간'에 불과하다.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열외인종 잔혹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흔하디 흔한 사람들이다. 치열한 취업전선에서 정규직을 향한 집념을 불태우는 된장녀 윤마리아,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 PC방 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2층건물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는 겜덕후 기무, 현재도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그 시절을 살고 있는 퇴역군인 장영달, 매혈한 돈으로 구한 싸구려 양주와 안주로 공원에서 대낮에 술판을 벌이는 노숙자 김중혁 등이 그들이다. 뭔가 개성이 있어서 등장한 인물들이 아니다. 취업전선에서 허덕이는 청년, 군복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멸공 반공"을 외치는 노인, 내일의 희망을 잃은 채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 해고 뒤 기약없는 노숙생활을 이어가는 장년의 모습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현실의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이 체제를 뒤엎겠다는 엉뚱한 쿠데타에 엮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주인공들은 제각각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겨우 '같은 인간이다' 정도가 꼽힐 정도로 제각각이다. 그에 반해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펼치는 개성이 거슬릴 정도로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현실을 극복하는 슈퍼맨이 아니라, 일상의 고단함과 즐거움에 울고 웃는 우리와 닮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섞어찌개처럼 엉켜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현장을 유별나게 보는 일도 없지 않은가.


이곳에서 우리는 웃기지도 않을 만큼 기가 막힌 기계적 노동의 노예가 되어왔다. 아침 시간만 되면 지옥철 속에서 서로의 역한 냄새를 맡아가며 살아왔고, 종일 사무실이든, 학교든, 여하튼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꽉 막힌 곳에서 기름칠 덜 된 윤전기처럼 돌고 또 돌았다. 컴퓨터 자판과 씨름했고, 각종 서류들과 부대꼈다. 어떤 이들은 작업복을 입고 기름때 묻히는 걸 무슨 신성하고 영원한 업業인 양 신앙하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삶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전하고 책동하는 몇몇 착취자들의 사탕발림에 속고 또 속아 잉여의 헌신을 최선의 미덕으로 믿기까지 했다. 그것만이 우리의 신이었고,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한겨레출판, 2009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긍정의 배신>에서 밝혔듯이 교회, 회사 등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긍정할 것'을 강요한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결과가 나쁘더라도 자신의 책임이니 다른 탓을 하지말라'는 도그마가 주입된다.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루하루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철저히 도그마에 종속되고 세뇌된 결과다. 하지만 약속됐던 장미빛 미래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저 속절없이 먹어버린 나이와 늘어난 주름살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면 '긍정의 배신'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인생은 대개 99%에 해당한다. 저자는 쿠데타를 일으킨 '정체불명 양대가리 집단'의 혁명 포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살면서 일부는 닭대가리, 말대가리, 또 일부는 양대가리가 되어가고 있다. 닭대가리는 흡사 무뇌아와 같으며, 양대가리는 목자를 잃은 채로 어느 순간 도살당할 비루한 운명의 결말을 기다리는 무지의 포로와 같다.


이 거대하고 무가치하며 아무 결론도 희망도 없는 집합체인 이곳, 최악의 도시에 볼모 잡힌 가련한 영혼들을 그 몇몇의 착취가들, 자본가들, 이상주의자들, 얼치기 정치인들, 회칠한 종교인들은 뭐라고 찬양했던가?그대들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이라고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각종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삶은 전혀 유치하지 않다고 여기도록 서로가 서로를 철저하게 세뇌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이 세뇌와 무뇌의 시간이 계속될 것처럼 설교해오지 않았던가?


-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한겨레출판, 2009


'정체불명 양대가리 집단'은 이 나라의 중심인 서울 한복판, 그것도 소비문화의 최첨단에 서있는 삼성동 코엑스몰을 무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이 방화셔터를 내리고 전원을 끊은 다음, 고립된 시민들을 대상으로 혁명포고문을 낭독하고 사회에 대한 반란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반란은 무기력하다. 정작 그들이 비판해 마지 않던 착취가들, 자본가들, 정치인들, 종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한다. 그들이 볼모로 잡은 이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매일 같이 비루한 운명의 결말을 기다리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주인공 윤마리아, 기무, 장영달, 김중혁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끼어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정체불명 양대가리 집단'의 쿠데타는 어떤 의미도,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그저 분노를 발산하는 폭력의 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열외인종 잔혹사>는 딱히 명작이라 하기는 어려우나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빠르다. 각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오가며 빠르게 전개되는 스토리가 재미있으나 코엑스몰에서의 대단원에서는 매끄럽게 마무리 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든다. 토끼몰이는 잘했으나 결정적으로 토끼사냥에 실패한 것 같은, 그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지만 <열외인종 잔혹사>의 매력은 승자독식구조가 한층 강화된 현대사회의 경쟁구도에서 낙오된 99% 대다수를 그려내는데 탁월했다는 점에 있다. 답답하고 무능해 보이는 작품 속 캐릭터들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저자가 세밀히 묘사한 그들의 모습과 삶의 디테일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소시민, 특히나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결코 서로를 보듬지 못하고 저 살벌한 도토리 키재기로 내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 하다.


물질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린 오늘날, 문학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저자가 그린 우화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눈물나게 또는 재미나게 그려냈지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을 더할수록 깊은 무력감을 느끼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 삶은 아직도 잔인하리만큼 진행 중이다. 설사 살아갈 날이 내일 하루 밖에 남아있지 않는고 하더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 소박한 요구가 쉽게 포기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전하는 작가의 말을 옮겨보며 독자님들과 이 쉽지않은 고민을 이어가고자 한다.


경쟁과 착취, 혼돈과 모순,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돌이켜본 우리들의 현실은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서 비로소 드러나버린 '열외인간'이라는 낙인뿐입니다. 과연 이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른바 '열외인간'이라는 유전자로부터 말끔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민자본주의의 오물통 속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모두 열외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이런 것이 정녕 오늘의 우리들이 쏟아내는 분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소설은 과연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기는 한 걸까요. 만약 소설이 그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요.


-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한겨레출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