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었다. 불현듯 포털에 눈을 흘기다가 훈제오리가 눈에 띄였다. 이엉돈 PD처럼 '저도 정말 좋아하는' 메뉴였다. '제가 한 번 먹어보지도' 못하고 고향집으로 쐈다. 평소 공치사 할 일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내 처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고향에 보냈다. (귀향 할 때도 그렇고 연락을 안하고 불쑥불쑥 거려서 혼나기도 하는데 잘 안고쳐지는 버릇이다) 식구들 맛있게 먹으라고 보냈기에 이후 기억을 싸그리 잊고 지냈다.
며칠 인가 뒤였다. 퇴근 후 카페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평소에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는 분이다. 단, 뭔가 하실 말씀이 있거나 약주가 얼큰하실 때는 하신다. 전화를 받기 전 짧은 순간 머리 속으로 약주인가 꾸중인가 시나리오를 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형식적인 안부와 인사를 나눈 뒤 성미 급한 아버지답게 본론이 튀어나왔다.
"근데 집에 오리가 왔다. 훈제오리. 이거 누가 보냈는지 몰라서 며칠을 묵혀 뒀는데 혹시 네가 보냈냐?"
허... 이 답답한 분이 그냥 집에 모셔뒀던 거다. 운 나쁘게도 내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었나보다. 보낸 이를 모르니 손대지 않고 오리고기를 집에 그냥 모셔뒀던거다. 내가 보낸 것이라 밝히고 통화를 끝냈다. 편히 맛있게 드리시라고 말씀드리고 통화 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고지식하고 바른 분이구나.'
비록 아버지는 본인 말씀대로 '가방끈 짧고 가진 것 없는' 분이셨다. 그래도 미련할만큼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이 반평생을 일만 알고 사셨다. 결근 한 번 없이, 휴일도 반납하고 살았던 세월이었다. 대학 내내 집안의 도움을 못 보고 살았지만 원망이나 후회가 없었던 것은 그렇게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 분을 탓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탓할 것은 남 등쳐먹지 못하고 정직하게 땀흘릴 줄만 알았던 요령없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온갖 꼼수와 비리로 정당한 대가 이상의 몫을 훔쳐가는 도적놈들과 이를 용인해준 사회였다.
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가끔은 서글프다. 남들 다하는 요령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우직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이 이토록 밝은 미소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비슷한 정도의 분노도 인다. 공금으로 MMF를 굴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뻔뻔함이 그렇고, 땅을 너무 사랑하신 총리후보자의 눈물겨운 부정父情이 그렇다. 저들이 그토록 쉽게 땀흘리지 않고 부를 횡령하고 축적하여 상속까지 하는 동안에도 이 고지식한 남자는 퇴근 후 소주 한 잔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수십 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아버지의 수십 년 정직한 세월에 존경심을 일깨워준 공직 후보자들께 감사하다. 반면교사의 비용이 컸던 점은 안타까움으로 남지만.
최초로 진秦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고 물었다면, 오늘 대한민국에는 "도적장상盜賊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고 답해줄만 하다. 도적장상이 되지 못한 백성들은 오늘도 빈주먹을 쥘 뿐이다. 황소같이 우직하고 부지런한 국민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건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몇 천원에 울고 웃으며 하루의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이 진한 땀냄새가 닿지 않는 검은 밀실에서 오늘도 은밀한 거래와 악취나는 돈다발들이 오간다. 황소의 꼬리에 윙윙대는 파리처럼 꼬리로 아무리 쫒아봐도 파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봐도 파리의 박멸은 요원한 듯 싶다.
아버지께 감사하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셔서. 비록 내가 물질적으로 혜택을 받은 것은 없지만 오히려 떳떳하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 삶으로 내게 깊은 가르침을 남기셨다. 비록 내가 못나 그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랑스러워할 아버지는 계시다. 쪽팔리지 않는 아들이 되겠다는 생각은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더하고 있다. 마무리하고 아버지께 전화나 한 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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