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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강신주] 시를 읽는 새로운 눈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동녘 | 2010-07-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현대 철학을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책이 없을까?우리 시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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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현실에 유감이 많은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겠냐만 특히 아쉬운 게 몇 가지 있다. 예체능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켜 악기 하나 못 다루게 된거나, 시읽기를 마치 점수 잘 받게끔 암기하는 것으로 알게 했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 늦바람이 나서 홀로 집에서 기타를 튕기거나 맘에 든 시집 한 권을 들고 읽으며 느껴보고 사색하고 있다. 하지만 감수성이 더 예민하고 풍부했던 시절에 누렸더라면이란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시인이 교과서에 실린 자신의 시로 출제된 시험문제를 풀어봤더니 거의 틀렸다는 일화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누구의 권위인지는 모르나 살아숨쉬는 시를 교과서의 책장 안에 박제한 순간부터 시는 느낄 대상이 아니라 암기할 대상으로 변질됐다. 그 암기에서 낭패를 보고 시험을 망친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시는 아직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으로 남아있다. 오히려 정규교육과정을 벗어나면 자유롭게 시를 읽고 사색할 수 있게 되면서 시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이게 원래 교육의 역할이자 목표 아닌가), 교육의 역할과 효과를 의심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소설과 달리 시는 많은 것은 함축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 사상, 역사 등 수많은 것들이 그 짧은 몇 마디의 단어조합에 응축된다. 그래서 산문과는 다르게 독자에게 보다 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이 좋은 시를 모르고 지냈던 시절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독자라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길라잡이로 삼아보는 것도 좋은 첫걸음이 될 것 같다. 시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철학이란 도구를 통해 바라보는 시가 한층 깊은 맛을 낼 뿐더러 덤으로 철학의 향기도 느낄 수 있으니 양수겸장의 계책이 아닐 수 없다.

 

철학자인 저자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시와 철학의, 철학과 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시인이 들어갔던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시인이 느꼈던 낯선 물고기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테니까요.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가 만든 특정한 그물을 물속에 던지면 그것에 딱 어울리는 특정한 물고기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2010, 동녘, 17~18pp..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곁에 두고 살지만 오히려 깊은 깨달음과 비가시적 구조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는 세상이고 오늘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한계와 구조적 모순에 힘겨워하며 하루를 산다. 허나 사람은 표현하는 존재다. 그 답답함을 표현하지 않으면 화병이 난다. 상감의 비밀을 홀로 품고 병이 났다가 대나무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를 외친 다음에야 해방됐던 임금님의 이발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다. 시는 그 카타르시스를 대신해 줄 훌륭한 도구다. 시가 오랜 시간 인류에게 사랑받아 왔던 것도 바로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파해 왔고, 철학자는 그 내면을 면밀히 관찰하고 끄집어 내는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통섭의 시대라는 지금, 통합의 시도들이 소외받고 죽어가던 인문학에 숨을 불어넣고 있다. 4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레 미제라블>의 흥행을 발판 삼아 <레 미제라블>, <위대한 개츠비> 등의 원작 소설들의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 역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등의 책들에서 보듯이 문학이나 시를 통해 좀 더 대중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좋은 시도라고 본다. 사고하지 않는 시대, 고찰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철학의 새로운 시도들이 좋은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도 없지 않다.

 

고전으로의 회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자기계발서나 힐링, 멘토링에서 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고전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고 분석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난 고전 역시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던져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중이 원하는 답이란 즉시 효과가 나오면서도 먹기가 편한 일종의 자양강장제(박카스 같은) 종류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더욱 고민하게 만들고 사색하게 만드는 고전에서 성미급한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얻어낼 것이란 기대는 무리다. 이것도 결국 일순간의 르네상스로 마감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본원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고독과 삶의 무게들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이상 인문학과 고전들이 쉽사리 버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처럼 "~ 해라"는 명확한 교훈과 가르침은 없다. 결국 인간이 짊어진 문제의 답은 인간에게서 찾아야 하고 그 오랜 방황의 역사는 철학과 문학 등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있는 번뇌와 고민의 골목길을 헤메일 것이다. 그리 녹녹치 않고 고생스런 과정이기는 하나 자기의 답을 찾는 왕도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스스로가 걸어간 만큼만이 자신의 몫일테니. 여행스케치의 노래 가사 한 자락을 빌려 봐야겠다.

 

"산다는 건 그런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