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방송의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시청했습니다. 일반인 시청자의 고민을 접수하고 방청객들의 공감을 많이 얻으면 우승하는 형식의 방송이지요. 여기에 고민을 호소하는 한 주부가 출연했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사람만 만나면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 남편'입니다.
남편이란 사람은 자녀들에게도 철저한 관리와 계획으로 자기계발을 할 것을 요구했는데, 어찌나 훈계를 하던지 초등생인 딸이 매년 계획을 40대까지 짜놓았을 지경이었지요. 심지어 딸의 피아노선생님한테도 훈계를 늘어놓았다니 병은 병이지요. 이 남자가 반복해서 사용한 어휘는 '계획'과 '성공'이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실행하고, 그래서 성공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성공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라면 면밀한 계획수립과 철저한 실행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토록 바라는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명예인가요? 혹은 돈인가요?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무 자르듯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확신의 함정에 빠져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에우튀프론>이란 글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으로 향하던 중 자신의 아버지를 '경건하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고소하러 가는 에우튀프론이란 사내를 만나 나눈 문답이지요.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질문을 통해 '경건하다'는 말의 정의를 에우튀프론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제 나는 자네가 경건한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보네. 그러니 좋은 친구여,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기지 말고 말해주게.
에우튀프론: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소크라테스. 바쁜 일이 있어 지금은 가봐야 하니까요.
- 플라톤, 최명관 역, <플라톤의 대화편>, 도서출판 창, 2008, 83p.
소위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진 에우튀프론은 결국 이 짖꿏은 노인에게서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의해 '경건한 것'의 정의를 몇 번이고 수정하던 에우튀프론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처음의 주장만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사전에서 국민MC를 찾아봤더니 유재석이라고 쓰여있었는데, 다시 유재석을 찾아보니 거기에 국민MC라고 쓰여있었다고나 할까요?
'성공'의 절대적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공의 기준을 인정하는 주체인 인간은 단일한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많은 돈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 둘에게 성공의 의미를 물으면 각기 다른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사진의 멘트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성공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같은 소위 '좋은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구요? 위처럼 말하는 경우, 많은 이들은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쉽게 순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성공의 척도를 고민해 보는 것이 아니라 편리하게도 '그래 성공은 부유해지는 것이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유해 지는 것,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 부정적인 가치는 아닙니다. 좋은 것, 선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이 왜 좋은 것 혹은 선한 것이 되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남이 대신해준 '좋은 생각'이 정의하기 어려운 '성공'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겠느냐는 점입니다. "성공하기 위해 (닥치고) XX해라", "성공하기 위해 (닥치고) 해야할 7가지" 같은 자기계발서류 좋은 생각들은 결승점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단 뛰고 봐라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사고하는 것은 귀찮고, 때로는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철학서를 읽는 것보다 교과서를 읽는 것이 수월한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철학서보다는 교과서처럼 딱 떨어지는 답을 주는 자기계발서가 인기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는 자는 독자가 아니라 책을 파는 자기계발서 저자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저자들이 에우튀프론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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