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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주의가 산만한 학생 출신의 걱정



일본의 인기만화 <20세기 소년>은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다. (일본에서는 3부작 영화로 촬영돼 개봉됐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부 이후에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작품은 주인공 엔도 켄지와 그의 친구들이 '친구'라는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로 자칫 유치한 영웅담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읽어보면 마냥 그렇게 간단한 작품은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작품의 초반이다. 주인공 엔도 켄지는 그의 어린 시절인 1960년대를 함께 보낸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인 마루오, 요시츠네, 오초, 유키지 등을 찾아가게 된다. 어린 시절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자랑하던 친구들은 십 수 년이 지난 뒤 평범한 선생이나 자영업자, 회사원 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실상 우리네 어린 시절 친구들을 찾아가도 대략 이런 상황이 많을 것이다. 현실에 치이고 일상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개성 있는 친구였을 것이지 않겠는가?



주말에 대학로에 나갔다가 <20세기 소년>의 한 장면을 떠올릴만한 모습을 보게 됐다. 한 무리의 소년들이 모두 똑같은 땡땡이 무릎담요를 받아서 걸치고 있었다. 담요는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크기였지만 소년들이 착용한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머리에 두건처럼 두른 녀석, 등 뒤에 망토처럼 걸친 녀석, 치마처럼 엉덩이에 두른 녀석 등등 제 스타일대로, 제 내키는 대로 담요를 활용하고 있었다.

 

'저런 엉뚱한 녀석들... ㅋㅋ'

 

속으로 웃었지만 이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올라왔다. 내 눈에는 아이들이 받은 담요가 그 두께나 크기로 봐서 전형적으로 여성들이 무릎에 걸치는 담요로 보였고, 그렇게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식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것처럼, 담요는 치마가 될 수도 있었고, 두건이 될 수도 있었으며, 망토가 될 수도 있었다. 이미 고정관념에 물들어 거기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그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잃은 아저씨가 돼버렸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었다. 동시에 그 창의성과 자유로움이 부럽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도 이미 아이들이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빼앗겨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릎담요는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크기였지만 색깔만큼은 하늘색과 핑크색의 두 가지였다. 헌데 남자 아이들은 하늘색을,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을 선택해서 가지고 있었다. 사진에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여자 아이가 하늘색을, 남자 아이가 핑크색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아이들을 인솔하던 선생님들은 예외였지만...) 이미 '남자는 이래야 돼, 여자는 저래야 돼' - 예를 들어 남자 아이는 장난감총이나 로봇을 선택해야 칭찬받고, 여자 아이는 인형을 선택해야 이쁨 받는 식의 교육 - 라는 사회적 성역할 (강요)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였다. 이로써 아이들은 동일한 인간에서 남자 인간과 여자 인간으로 각각 분화하여 평생 동안 '남자들은~''여자들은~'을 반복하며 서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뿐이겠는가. 어른이 되고 철이 든다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훈육되고 교화되면 지금 보석처럼 빛나는 백인백색의 개성은 사라지고, 잘 깎이고 다듬어진 기성품 인간으로 퇴화할 것이니... 안타깝다.


 


감시와 처벌

저자
미셸 푸코 지음
출판사
나남 | 2003-10-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 책은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 처벌의 기구 ― 가정,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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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을 예로 들어 규율과 훈련에 기반한 각 개인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재조직화 되고, 지배에 순응하는 신체를 가진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는지 밝히고 있다.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펜옵티콘(Panopticon)이란 원형의 감옥을 차용해 근대적 개인들이 지배자의 감시와 처벌 속에 그 자유를 잃고 규율에 따라 훈련된다고 봤다. 예로 든 감옥 외에도 우리는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비슷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훈련되고 있다.

 

무릎담요를 두건으로, 망토로, 치마로 활용하던 아이의 자유로운 영혼이 그 창의성을 본격적으로 잃기 시작하는 공간은 학교일 것이다. (이미 최초로 가정에서 마사지를 좀 받겠지만 학교나 군대만큼 감시와 처벌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제외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가정통신문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말이 '주의가 산만합니다'였듯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의 자유로움과 개성은 학교로서는 '산만함'에 불과하다. 아이의 산만함은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초중고 12년 동안 철저히 교정(?)되고 순화(?)된다. (요새는 대학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만...) 어디 그 뿐인가.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후 꼭 가야만 하는 군대는 펜옵티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군대에서 군인들이 서로 간에 '너무 앞서지도, 너무 쳐지지도 말고 딱 중간만 가는 게 좋다'는 충고를 자주 하는 것은 그 좋은 근거다. 튀면 안 된다. 개성, 창의성 이런 거 필요 없으니 그저 상사나 윗사람 등 지배자가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게 군대의 생리다. (선임들의 부라리는 눈은 항상 후임병을 감시하고 이에 반하는 행위는 바로 얼차려와 갈굼 등의 처벌로 이어진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군대를 제대한 남성들이 사회에 나와 각 기관과 기업 등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만든 조직논리와 분위기 역시 군의 생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혁신과 개혁, 변화 등을 외치지만 거대해진 조직의 완고함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여성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여성들도 교육과정에서 남성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 가정에서는 예비역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과 지냈으며, 군대식 조직문화가 지배하는 기업에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의가 산만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규율에 충성하는 어른으로 훌륭하게(?) 교화된다.


 

허나 지금은 말 그대로 21세기다. 시키는 일만 잘하는 병정형 인간이 시대를 리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보와 지식, 창의성이 미래의 핵심가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은 이제 작은 시골마을의 촌로라도 느낄 정도의 현실로 다가와 있다.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한 <응답하라 1997>에 등장한 추억의 삐삐(무선호출기)가 스마트폰에 주요한 통신수단의 자리를 내주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5년이 되지 않았다. 삐삐에 '1004''486'이 찍혀 날아온 음성메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 줄을 서서 기다리던 어느 소년의 머리 속에는 바로 상대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욕망과 음성메세지를 남긴 상대에 대한 상상력(필경 잘생기고 이쁜 이성친구일 것이란...)이 휴대폰을 만들었다. 그리고 흑백이었던 휴대폰 액정화면을 컬러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컬러폰을 등장시켰고, (심지어 카메라도 달렸다!) 러가 된 화면으로 게임이나 인터넷을 할 수도 있겠다는 창의적 시도가 스마트폰까지 탄생시켰다. 거세되지 않은 창의성과 자유로움 이 시대와 미래를 이끌어나갈 주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은 이런 경향성에서도 읽을 수 있다.


 

헌데 이 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회를 만들기는커녕, 대통령 각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수시로 감시당하고 (뭐 요새라고 다르겠는가.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지속적으로 민간인을 '사찰'했음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심지어 각하에 대한 불경한 말 한 마디에 막걸리 보안법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벌받던 시절을 희구하는 일단의 흐름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펜옵티콘을 완성하여 60~70년대를 장악했던 독재자의 딸이 2012년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대선가도를 단독질주하고 있다. 그 지지층들은 그 시절의 무식한 노동억압과 산업·지역불균형적 경제성장을 '결과가 좋았다'(머리가 있으면 박정희 유신 말기에 중화학 공업 과잉중복투자로 이 나라 경제지표가 어떻게 절단 났는지 좀 찾아봐라. 공산국가에서나 벌어지던 치약부족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게 그 성공했다는 유신경제의 결과다) 독재자의 딸에게 그 시절의 추억을 투영시켜 'Back to the Past'를 주문하고 있다. 감시 받으며 정부가, 회사가, 학교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고,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폭력으로 사정없이 처벌하는 사회로의 회귀는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창의성과 지식정보기반 혁신시도들은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그 씨가 마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리하겠다. 그 시절의 경제성장이 그리우면 우리는 한참 개도국의 과정을 거치는 중국 등의 성장단계로 내려가면 된다. 허나 가발이나 조잡한 인형, 신발 만들어서 수출 100억불에 눈물 흘리는 건, 지금의 반도체 만들고 자동차 수출하는 한국경제에서 가능하지도, 이뤄질 수도 없는 과거의 꿈일 뿐이다. 꿈 좀 깨시라. (정 그 시절이 그리우면 당신들이나 좀 돌아가라) 지금 우리가 나갈 방향은 앞서 이야기한 무릎담요를 두건으로, 치마로, 망토로 활용하는 아이들의 창의성과 개성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쪽이다. 그 아이들 속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 그들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와 기업의 혁신이 달려있다. 이제 그만 시대착오적인 반동적 시도를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