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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

[이상호 기자 X파일: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이상호] 곤조 있는 기자의 외로웠던 투쟁기

VHS방식의 비디오 테이프로 홍콩영화를 보던 시절이 바로 몇십 년 전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항상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만화를 배경으로 "옛날 어린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호환마마, 전쟁...."이라는 멘트가 나왔다. 나중에는 개그의 소재가 되어버린 이 멘트가 지금에 와서도 유효한 현실은 비극이다. 최소한 이상호 기자의 이번 저작 <이상호 기자 X파일>을 읽고나면 그렇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삼성'과의 10개월에 걸친 투쟁기를 읽다보면 거대한 자본력 앞에 무력한 개인과 조직이 겪은 고뇌와 갈등, 고통이 피튀기며 다가온다. 조세희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서문에 쓴 "당대의 모순된 현실이 개선되어 내 책이 팔리지 않고 절판되는 시대를 꿈꾼다"는 소망이 실현되기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오지게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시사매거진 2580><민창식의 뉴스 A/S>에서 탐사전문 고발기자로 명성을 떨친 이상호 기자에게 '삼성 X파일'에 대한 제보가 들어온 것은 어떤 운명 때문이었을까. 고발기자로 살아온 시간 동안 숱한 가시밭길을 헤쳐나온 그였지만 이번 상대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말마따나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의 정점에 선 삼성이었다. 제보를 받으면서도, 기획에서 미국 현지 취재에 나섰을 때도, 결정적인 증거인 도청테이프를 입수했을 때도, 조직 내의 압력에 고립됐을 때도 얼마든지 타협하고 비단길을 갈 수 있었던 그였다. 허나 이상호 기자는 그 길 마다하고 이리와 승냥이떼가 우글거리고 시체가 나뒹구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이 길이 내게 유리하냐 아니냐'보다 '이 길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진 기자의 '곤조'였다.

 

곤조. 언론바닥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원래 일본어로 '근성'이란 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자적 곤조라 하면 진상 혹은 막무가내의 부정적 늬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현장취재를 담당하는 기자에게 있어서 필수라 할 수 있는 덕목이다. 하지만 (어느 언론사 관계자의 말처럼) 샌님같은 직장인 기자가 늘면서 곤조있는 기자는 오히려 희귀한 경우가 됐다. 주진우 기자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퇴 기자회견장을 다녀와서 "질문하지 말라고 하니까 진짜 아무도 안 하더라"는 말을 했는데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상호 기자나 주진우 기자가 각광을 받는 이유도 이들이 곤조있는 희귀한 기자이기 때문이다.


이상호 기자 X파일

저자
이상호 지음
출판사
동아시아 | 2012-07-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삼성X파일 보도의 숨겨진 진실과 묻어두었던 기록, 시대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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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조있는 기자는 공익적인 관점에서 훌륭한 기자일지 모르지만 개인으로서는 하루하루가 고통인 골고다 언덕길이다. 특히나 탐사보도나 비위고발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들은 더욱 그렇다. <이상호 기자 X파일>에도 잘 소개되어 있듯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는 기본에다, 가정생활에 불성실할 수밖에 없어 가족으로 하여금 큰 희생을 요구한다. 취재원이나 선후배 등 동료에게 못할 소리도 해야만 할 때가 많고, 조직 내에서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자기 잘난대로만 하려는 오버맨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이상호 기자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비 맞아가며, 할퀴어 가며 갔다. 책을 읽는 동안 삼성과 청와대, 국정원이 한 몸이 되어 진실을 땅에 묻으려는 마타도어보다는 그에 맞서는 이상호 기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유혹에 흔들리고, 장벽처럼 느껴지는 한계 앞에서 도망치고 싶고, 끓는 분노와 터지려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만 했던 내면을 고백한 그의 글엔 분명 그런 힘이 있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건강하지 못한 '이상한 사회'(이상호 기자는 말도 안되는 벽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이상한 사회다"고 반복해서 말한다)의 견고한 프레임만 다시 확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책의 앞부분에서 안기부 미림팀이 도청한 삼성 97년 대선자금 X파일의 존재를 제보받고 이를 입수하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지는데 사실 여기까지는 양념에 불과하다. 이후 2/3에 이르는 분량은 MBC 내부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서술과 생각들이다. 공공연히 비위행위를 저지르는 선배와 그와의 갈등, 밖으로 새나간 내부 비위사실, 그로인한 조직 내 배타적 분위기로 인해 삼성 X파일의 보도는 최초 제보로부터 무려 10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삼성에 매수되거나 삼성을 두려워하는 MBC 내부 구성원들의 압력으로 '이상한 놈'으로 찍혀 팩트조차 보도하지 못했다. 삼성장학생에 의해 기사와 자료를 도난당했다는 대목에서는 그 뿌리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삼성의 (돈의) 힘에 질릴 법도 하다. 보안을 강화해도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장학생들에 둘러쌓여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불쾌함과 공포는 충격과 동시에 현실이란 시궁창의 맨살을 여과없이 각인시켜 준다. 물타기를 하려는 <동아일보>와 첩보를 눈치챈 <조선일보>가 먼저 보도하려 하자 얼렁뚱땅 보도됐다는 뒷이야기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펴낸 지 얼마 되지 않는 책을 스포하는 것은 저자에게도, 잠재적 독자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고 본다. 따라서 책의 컨텐츠를 다룬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하려고 한다. 다만, 연희동 전두환 사저 앞에 가서 호위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길바닥에 드러눕는 '이상한 기자'에 흥미가 간다면 일독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5공 때나 있었던 보도지침이 있지도 않은데 왜 지금도 방송, 신문에서 찍어내는 기사는 이리도 똑같은지, 언론의 보도가 필요한 곳에는 왜 정작 기자가 없는지 궁금했던 분들께도 추천드릴 수 있다. 읽고나면 이상호 기자 같은 기자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개인으로서도 그렇지만 이제 그는 이 사회의 자산이 되버렸기 때문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언론계 인사들을 초청해 여는 강연을 들어본 일이 있다. 신경민 앵커(당시는 앵커직에서 막 물러났을 때고 현재는 국회의원이시다)에게 물었다.

"이전의 방송이 정치권력과의 싸움을 통해 언론자유를 수호했다면 이제는 자본권력의 힘이 막강하다. 방송은 자본권력과의 싸움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느냐?"

고 물었다. 신 앵커는

"무섭다. 자본권력 아주 무섭다. 하지만 종교권력도 무시 못한다... 쏼라쏼라"

고 답했다. 실망스런 답변이었다. 손석희 교수나 김용철 변호사들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언론계의 당면과제라고 밝힌 반면 신 앵커의 답변은 이를 살짝 회피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퇴행적으로 후퇴한 언론계 현실과 더욱 거세지는 자본권력의 총공세에 직면한 기자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지켜볼 일이다.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은 주진우나 이상호가 주목 받는 이유는 시민들이 원하는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자본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기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 18년간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기자다. 일반인이 보면 기자적 곤조가 넘치는 이 남자의 기행을 이해할 단서가 나왔다. <이상호 기자 X파일>. 이제는 자본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말하는 이 남자를 들여다 볼 수 있는 X파일. 흥미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