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 상품들을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그런데 그게 엄청 대단한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배려, 조금 더 신경 쓴 차별화 등. 일례로 자동차 조수석에 있는 손잡이는 바로 일제 자동차 메이커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조수석에 앉은 탑승자가 중심을 잡고 안정감을 갖고 승차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이 작은 배려는 일제 자동차가 70~80년대 세계시장을 휩쓸었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일본의 소설들도 그런 것 같다. 독자가 작품을 읽는 중에 절로 작가의 장인匠人정신을 느낄 정도다. 히가시노 게이고, 다카노 가즈아키 등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테리 소설 작가들은 실제로 작품의 구상과 필요한 취재를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고 알려져있다. 먼저 그 빈틈없는 구성에 놀라고, 내용 전개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적 식견을 보여주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밀한 디테일을 확인하고 나면 '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이전에 소개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과 다르게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장편소설이다. 양이 좀 많다. 하지만 퀄리티는 확실하다. 작가가 10년에 걸쳐 쓴 작품으로, 작가 스스로도 "나 자신의 인생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수상내역을 보면 13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른 작품이니 (이 랭크에서 1위면 사실 그냥 믿고 보는 수준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야기를 치밀하게 진행시키다보니 성미가 급한 한국의 독자는 "좀 빠릿빠릿하게 진행하지 못하고 이렇게 늘어져서야 -_-" 할 수 있겠지만, 압도적인 몰입감과 중독성이 충분히 그 부분을 커버할 수 있다.
쇼와昭和 64년(1989년), 한 소녀가 유괴를 당한다. 경찰은 결정적인 실수를 연발하며 범인이 요구한 2천만엔과 함께 범인을 놓쳐버리고 만다. 이 사건 이후 14년이 흐른 뒤, 관련 수사관들은 의문의 사직 후 귀농하거나 실종상태로 지내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카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형사라고 정의하는 인물이나, 현재는 D현경의 홍보담당관으로서 매일같이 야수같은 기자들과 아귀다툼을 하며 지낸다. 그랬던 그가 14년 전의 유괴사건에 다시 휘말리게 된 것은 D현경과 도쿄 본청 간의 알력싸움 때문이다. 경찰 내부의 갈등과 14년 전 유괴사건에 파묻혔던 비밀이 불거지면서 이야기는 하이라이트를 향해 치닫는다.
기자생활을 했던 작가의 커리어와 경찰 내부 관계자라도 섭외한 듯한 현장감이 어울려 보기드문 경찰미스테리물이 탄생했다. 이 소설의 다른 리뷰를 보아도, 미스테리라기보다는 '경찰소설'이라고 평가하는 이가 많을 정도다. 분명 스토리 전개나 소재는 미스테리물이나, 진행되는 곳곳에서 그려지는 경찰 내부의 디테일은 사회파 소설로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 인간과 인간의 욕망에 관한 작가의 집요한 탐구와 고찰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렵고, 항상 긴장 속에서 알 수 없는 것들 사이를 헤매이며, 그 속에서도 뭔가를 원하고 그것을 좇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매우 치밀하게 묘사한 대목이 압권이다. 화자인 미카미의 생각으로 그려지는 그 욕망은 인간의 본질과 삶에 대해 다시금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황금연휴가 시작됐다. 볼만한 미스테리물을 찾는 독자라면 감히 추천하고자 한다. 워낙 작품이 훌륭하기도 하지만, <64>의 또다른 미덕은 '매우 번역이 잘되었다'는 점에 있다. (번역본 도서를 읽어보신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미스테리물은 내용에 대한 리뷰가 그리 많이 필요치 않다. 일단 한 번 읽어보시라. 분량이 좀 많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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