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종교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부득이) 일부 사이비나 문제 있는 먹사들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받아들이는 태도는 천태만상이지만 마지막에가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들의 항변은 "모든 개신교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였다. 그렇다. 일부가 그렇다하여 전체를 폄훼하는 일반화의 오류쯤은 지성있는 자라면 마땅히 지양하는 바이다. 그런 면에서 법관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를 불신하고 정권의 눈치를 본다며 손가락질 한다. 하지만 막상 현직에서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분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청와대 쪽으로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쪽이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 때문에 법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까지 일반화하여 평가절하 한다면 후자에 속하는 분들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마치 일부 목사들때문에 편견의 눈빛을 견뎌야 하는 선한 목자들처럼 말이다.
현직 부장판사인 문유석이 쓴 <판사유감>은 그래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가 법원 내부의 통신망에 올린 글들이 같은 법관들의 공감을 사면서 외부에까지 알려졌고 이것이 책으로 정리돼 출간됐다. 현직 법관으로서 처해있는 상황, 우리 법원의 분위기와 관행, 국민에게 더 다가가고자 하는 사법부의 모습을 비롯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고뇌할 수밖에 없는 법관의 무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심판해야 한다는 데에 따른 성찰 등 저자의 수준과 마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혹은 주변에 있는 법관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다고 말한다. 혹시 우리는 편견이란 안경을 쓰고서는 사법부와 법관을 지나치게 치우쳐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항상 그렇듯이 '욕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각종 강력사건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자 국민여론은 사법부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울산 계모 여아학대 사망사건(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6/12/0200000000AKR20140612102400051.HTML?input=1179m)을 들어보자. 법원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형량이 나오자 일부 시민들과 단체들이 법원 앞에 가서 항의집회를 하기도 했고, 피의자에 대해 항소한 울산지검에 격려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법원의 '솜방망이처벌'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어떨까. 다음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듯 하다.
한 번은 우발적인 살인사건이었는데, 배심원 7명 중 4명은 징역 6년, 1명은 징역 5년, 나머지 두 명은 8년, 10년을 제시 하더군요. 통상적인 법원의 양형례보다 너무 낮은 의견들이라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국민의 사법 참여라는 국민참여재판의 취지상 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일반적인 예보다 낮은 형을 선고했습니다. 아마도 비난 댓글이 폭주했겠지요. 무작위로 선발된 배심원들이 오히려 판사들보다도 낮은 양형의견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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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일화에 대하여도 배심원들의 값싼 동정이라거나 피고인의 쇼가 아닌가 하는 등의 냉소가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직접 배심원이 되어 보면 어떤 의견을 낼지는 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전자책 75쪽)
- 문유석, <판사유감>, 21세기북스, 2014
엄벌을 주장하던 그 사람들, 법원의 배심원석에 앉혀서 사건의 모든 자료와 기록, 상황을 다양하게 접해보고나서도 그저 함무라비 법전식의 엄벌주의만 주장할 수 있을까. 세상일이란 것이, 특히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고 마는 것 아닐까.
범죄에 따른 처벌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양형 정도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판단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피의자에게 징역 5년과 징역 7년을 구형하는 이유가 크게 다르기 어렵고 2년의 차이를 모두가 납득하게끔 설명할만한 논리가 있을리도 없다. 우리 시민들에게는 감정적으로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억지는 결국 스스로와 주변인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고민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법관인 저자이기에 그 쪽 이야기가 많지만, 그 외에도 저자의 개인적인 사색이나 의견들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저자의 평소 사고가 지닌 깊이를 느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자본주의의 냉혹한 시장에서 아무나 승자가 될 리 없고, 진짜 고급 정보라면 먼저 순순히 이야기해 줬을리가요. 제가 본 세상의 이치에 따르면 누군가 나에게 권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일입니다. (전자책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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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누구나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책에서 '돈이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이 훌륭하다'는 식의 교훈을 들으며 컸지만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면 바로 '웃기시네'라는 냉소만이 돌아오죠.
어리나 늙으나 대놓고 연봉이 얼마냐, 사는 동네가 어디냐, 모는 차가 뭐냐에 관심을 표하고, 대중매체에서는 럭셔리한 셀러브리티들의 삶을 예찬합니다. 인터넷 쇼핑몰 몇 억 대박이 어떻고,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뭐고, 드라마 주인공은 죄다 외제차 그는 재벌2세에,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이야기해 준다고 하고...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전자책 88쪽)
- 문유석, <판사유감>, 21세기북스, 2014
인간사의 수많은 갈등, 심지어 혈육과도 다투는 곳이 법정인지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욕망을 가감없이 보아왔던 저자답게 그 성찰의 깊이도 꽤나 깊다. 이 책이 단순히 현직 부장판사가 써서 화제가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판사유감>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한 사람의 시민이자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대한민국의 사법부와 법관들에 대한 불신을 일거에 해소할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판사유감>을 읽고 나면 고뇌하고 성찰하는 법관도 있을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법조계의 이야기를 일반대중에 공개한 사람이 저자 뿐은 아니지만(<헌법의 풍경>이나 <불멸의 신성가족>등을 통해 법조계의 분위기를 전한 김두식 교수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현직으로서 공개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저자 개인이 판사로서 재판당사자들을 접하면서 느낀 바들을 적은 챕터도 훌륭한 편이라 전체적인 만족도가 높은 책이다. 부제인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답다.
저자가 남긴 여러 명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두 마디를 소개하며 마무리하려 한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 책장을 덮으며 가장 만족했던 책이라서 그런지 여러 독자에게 소개하고픈 마음이 앞섰다. 휴가 시즌이라는데 마냥 음주가무로 지친 몸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보다는, 이런 책 한 권으로 마음을 돌보시는 것은 어떤지 권해본다.
(학생들에게) "오늘 많은 토론을 했는데 사실 난 이렇게 생각해.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하는 거야.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거든. 우리나라의 미래인 너희들이 정답만 잘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하여 꼭 필요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자책 165쪽)
"사람들은 '논리'나 '당위'로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해야 비로소 변화하지요." (전자책 205쪽)
- 문유석, <판사유감>, 21세기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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