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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법률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용산참사 4주년, 사법의 역사를 돌아보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저자
박원순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4-04-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크라테스의 재판, 예수의 재판, 중세 마녀의 재판, 드레퓌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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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소에 맹여사라고 부르는 대학동기가 있다. 나름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를 했었고 머리가 명석한 친구였다. (물론 평소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백치미가 좀 있어서 ‘맹여사’라고 불렸을 뿐이다) 이 친구와 맥주를 한 잔 마실 때였다. ‘법의 공정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게 됐다. 맹여사의 생각은 기대와 달리 너무 교과서적이었다. 법이니까 당연히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말을 덧붙여가며 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관해 학자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맞다. 헌법을 부정하지 않고서야 법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 미디어몽구)

 

맹여사의 대답이 조금 아쉬웠다. 그가 보는 법이란 단순히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란 당위적 반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이야기 나누고자 했던 부분은 ‘법이 공정한가?’였다. 하지만 그의 평소 사고는 당연히 지켜야할 것이기에 법의 성립과 집행에 관해 가진 비판적 견해가 없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면서 나는 용산참사를 떠올렸다. 실정법이란 이름으로 공권력이 일방적으로 국민을 폭도, 혹은 테러리스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불법딱지를 붙이고 나자 공권력은 더욱 잔혹해졌다. <지식e> 5권에서 한 용산참사 유가족이 한 인터뷰는 그래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다.

 

“우리도 한 때는 횟집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이 우리를 폭도 아니면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자 우리는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 철거민이 된 겁니다.”

 

뻔히 존재하는 권리금의 보장을 법이 미루고 있는 사이, 개인의 재산권 보호와 시장경제 수호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비웃어 마지않는 북한에서나 가능할 개인의 인권과 재산권의 침해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온갖 역설로 점철된 것이 세상이라지만 국가 단위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이건 비극이라기보다 희극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채플린의 말을 조금 변용해 보자면 이 정부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일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이하 내목짧조)는 지금은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이 변호사 시절에 쓴 책이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제목은 <유토피아>로 유명한 토마스 모어가 영국왕 헨리8세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당할 때 처형을 담당한 망나니에게 던진 조크에서 빌려왔다. <내목짧조>는 인류가 법률을 만든 이래 있었던 재판 중 세기의 흐름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재판 10개를 추려낸 글이다. 그 재판들에서 때론 잘못된 오심이 바로 잡히고 무고한 피해자가 명예를 회복하기도 한다. 반대로 인간이성이 마비된 이념 광풍이 생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재판의 결과와 그 의미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새롭게 평가받기 마련이다. 인간 이성과 도덕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과오에 대한 인간의 자정능력에 대한 신뢰가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목짧조>에 소개된 세기의 재판은 총 10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예수의 재판, 잔 다르크의 재판, 토머스 모어의 재판, 마녀재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 드레퓌스 재판, 펠리페 페탱의 재판,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D. 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하나 의미가 없는 재판이 없고 그것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무엇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굳이 기억나는 하나를 꼽으라면 드레퓌스 재판이 아닐까 싶다. 조작된 간첩 드레퓌스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군장성들의 마타도어와 이에 부화뇌동한 언론, 여기에 호도된 프랑스 대중을 상대로 프랑스와 전 세계 지성들이 벌인 투쟁은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로 그려내기에도 어려운 감동이다. (처한 현실과 상황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이런 극적인 해결을 보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선 더욱 목마른 결과다)

 

드레퓌스 재판처럼 법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물론 법이 진실을 은폐하려고도 했다)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감동적인 결과도 있었지만 역사에는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피해자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나서도 아주 오랜 시간 복권되지 못했던 역사가 그렇다. 성처녀 잔 다르크는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하고 복권되는데 무려 5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법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자 역사가 심판한 것이다. 한편 단순하게 볼 것도 아니다. 펠리페 페탱의 재판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히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이분법적 구도로 갈라보기에 어려운 경우도 많다. 온전한 정의를 구현해 내는데 있어 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애초부터 눈이 안보인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린 법을 절대화 할 것이 아니라 법의 상대적 한계를 인정하고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드레퓌스 재판을 보면서 강기훈을, D. 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을 보면서 마광수와 <즐거운 사라>의 오마쥬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우리의 한계와 수준을 확인하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아픈 과정이기도 하다. 그 많았던 과오와 인간 이성에 대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사법은 성숙해지지 못했다. 용산참사 이후 유가족 중 일부 사람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복역을 명한 것이 우리 사법부가 보여준 자신들의 현재다. 미숙했던 그 시절처럼 무자비한 칼을 휘두를 뿐 어디서도 반성과 참회,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상처는 여전하고 눈물은 마르지 않는 추운 겨울이다. 법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사진: 정청래 의원 트위터)

 

오늘로 용산참사 4주기를 맞으며 아직도 차가운 감옥소의 바닥에서 칼잠을 자고 있을 유가족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해결이 잔 다르크처럼 500년이 걸리기보다는 드레퓌스처럼 그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라도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너무 초조해 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기대나 실망만 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다. 아픔과 상처를 공유하며 서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버텨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유가족의 석방을 촉구하며 이 한 마디를 던져본다.

 

"여기,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