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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

[긍정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나친 긍정은 당신의 삶을 망칩니다




긍정의 배신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출판사
부키 | 2011-04-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신자유주의의 경제를, [정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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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코칭'뭐시기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또렷이 기억나는 내용은 '긍정적 피드백'이란 말을 지나치게 많이 썼다는 것이다. 강사였던 중년 여성은 뭔가 굉장히 즐겁고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과 높은 억양으로 긍정적인 내용을 주입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서로 긍정적인 신호와 피드백을 교환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 이런 신세계가? 할렐루야! 하지만 열심히 졸고 있는 학생에게도 그런 말을 했으니...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도그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컬트적인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며 작성한 내 답안지에 그녀는 C+이라는 훌륭한 점수를 주었다. (나는 성적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을 그녀에게 열심히 쏘아 보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녀가 따르는 긍정교의 교리에 따르면 나는 낙제를 면치 못할 인간이었던게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중 하나인 <긍정의 배신>은 긍정교敎와 긍정교주들, 그들의 숙주이면서 공생관계에 있는 자본, 종교, 학계 등의 커넥션을 밝히고 이들이 얼마나 근거가 빈약한 소리를 늘어놓았는지 파헤친 수작이다. (내케 코칭을 코칭했던 강사님이 꼭 한 번쯤 읽어보셨으면 하는 책이기도 하다) 역시 에런라이크 여사의 책 답게 깊이있는 취재와 다양한 저서와 논문, 언론자료 등을 근거로 긍정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 압권이다. 미국의 상황에서 미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네의 모습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대목에서는 비애가 느껴진다.


97년의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고용의 안정성은 크게 훼손됐다. 일반노동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사회 전반적으로 직업, 교육, 육아 등 일상의 대부분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져 만성이 된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그러자 사람들을 지배하는 '불안'이라는 신(혹은 악마)의 권능를 빌려 신흥종교를 팔아먹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들에게 전도된 회사나 교회까지 개개인에게 긍정적일 것을 강요한다. (심지어 부정적인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들은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가 개개인의 삶을 바꿀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더 큰 부자로 만들어 주신다", 혹은 "회사에서 해고됐다고 슬퍼하지 마라. 위기는 기회다.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니 불평하지 말고 기회로 받아들이라" 등 개인에게 희생과 자기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부정적인 결과는 결국 개인들의 책임이고 이를 극복하는 것 또한 개인들의 몫이란 긍정교의 가르침은 잔인하면서도 몰사회적이다. 각종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헌금을 더 많이 낸 것으로 신앙심의 척도를 재보자는 교회는 있지만 우리의 삶이 그리 긍정적으로 바뀌진 않은 것 같다. 돈을 빼먹은 사람들은 몇몇 강사들과 목사들일 뿐이다.


에런라이크는 <긍정의 힘>이란 책을 쓰기도 했던 긍정교 강사이자 목사인 조엘 오스틴의 예를 든다. <긍정의 힘>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긍정하라'는 오스틴의 메시지를 개인적인 경험을 나열하는 식으로 씌인 일종의 자기계발서다. 예전에 서점에서 일할 때 이 책만큼 불티나게 팔리는 책을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에런라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스틴의 세계에서는 하느님마저 지지자의 역할을 할 뿐 필수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다. 신비와 경외감은 사라지고 없다. 하느님의 존재는 집사장 내지 개인적 조력자로 격하되었다. 하느님은 나의 속도위반 딱지를 해결해 주고, 식당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주고, 내가 책 계약을 딸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런 사소한 과업을 위해 하느님한테 기원하는 것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공손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우리의 마음이 자석처럼 움직여 시각화한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일단 받아들이면 인간이야말로 전능한 존재가 아닌가?


-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부키, 2011, 189p.


하느님마저 내 소원성취를 위한 램프의 지니로 만들어 버리는 긍정교도들의 자신감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일종의 과대망상으로 볼 수 있는 이런 믿음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헛된 희망을 강요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이뤄지지 않는 소원은 스스로가 부정적인 믿음을 버리지 못한 (긍정교의) 이단에 불과함을 시인하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다.


현실의 무서움, 조건의 불평등 등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태도는 자칫 각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독소가 될 수 있다. 실현 불가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악조건 속에서 투쟁해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 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순간만큼은 가슴이 뛸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이 세계다. 아침마다 자신의 꿈을 세 번씩 복창하고 스스로의 태도를 문제삼아 다그친다고 당신의 처한 현실의 객관적 그 무엇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저 바뀌는 것은 약에 취한 듯 유쾌해진 당신의 기분일 뿐.


미국인들은 독일인, 캐나다인, 핀란드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덴마크인에 비해 계층의 상향 이동 가능성이 더 낮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라는, 기분을 풀어 주는 상쾌한 약을 복용하는 데 힘입어 신화는 강화되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지난 2006년에 비아냥을 약간 섞어 이렇게 진단했다.


"기회와 상향 이동 가능성에 관한 강한 믿음은 미국인들이 불평등을 잘 감내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조사 대상 미국인의 대다수는 장래에 자신이 평균 소득 이상을 벌 것이라고 믿고 있다(이는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부키, 2011, 251p.


과연 에런라이크가 인용한 브루킹스 연구소의 말처럼 미국인만 착각 속에서 살고 있을까? 오늘의 우리와 자신에게 진지하게 던져볼 질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께서도 자서전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신화는 없다"고.


비관하자는 말이 절대 아니다. 희망이야말로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신의 선물이다. 내일의 희망을 믿으며 오늘을 긍정적인 태도로 열심히 살 때라야 미래의 문이 열리는 것이란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건강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은 곤란하다. 심지어 그 착각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고 객관적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흐리게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에런라이크는 <긍정의 배신>을 통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도 각종 자기계발서와 수많은 강연자들이 (닥치고)'긍정하라'고 요구하는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긍정이 저지른 배신들을 되돌아 볼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