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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

[노동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그대의 이름은 멋있는 진짜 노동자




노동의 배신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출판사
부키 | 2012-06-0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긍정의 배신]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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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동자의 자식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난 수십 년동안 성실히 자신의 노동력으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부양한 노동자이며 내 조부와 조모 역시 그러하다. 어느 집에 금두꺼비 하나 놓고 지낸 세월 없겠냐는 말은 우리 집안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역사가 없었다고 하니 그저 당신들의 땀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가르쳐준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멋있는 진짜 노동자'였던 거다. 이는 아마 한국에서 서민층을 이루는 대다수 집안의 역사이며 당대의 현실이다. 현재의 우리와 과거 우리 조상들이 흘린 땀들이 모이고 적셔진 이 땅의 모습이 변화함을 지켜볼 때마다 세상을 움직이는 노동의 참의미를 깨닫는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에서 노동은 소외당한다. 철저한 상품화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계약직이 나뉘고 천문학적 고액연봉자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공존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작으나마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유지해 나가는 것조차 이젠 사치가 돼버렸다. 남은 것은 그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피투성이 경쟁관계뿐 어디에도 노동의 즐거움과 참의미를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이로서 노동은 그저 구매되고 소비되는 것일 뿐, 인간의 참 의미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중독된 '근로'의 당위만 강조될 뿐, 어디에도 인간을 향한 노동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퇴근하는 직장인들의 표정에서 생기를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8시간 근무를 요구하며 일어선 123년 전 미국 노동자들의 역사가 무색하게 21세기 대한민국의 5월 1일은 여전히 '근로자'를 위한 날로 둔갑한 채 그 흔적만 유지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유급 휴무를 갖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노동자의 날이란 의미를 그저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들의 날로 각색해 놓은 턱에 무슨 날인지도 생각해 볼 수 없게끔 노동의 의미를 거세해 둔 것이다. 노동절에도 그저 하루의 벌이와 생계를 위해 어딘가에서 땀 혹은 피를 흘리는 노동자들을 보게 되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것은 바로 노동의 의미를 왜곡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부키, 2012, 129p.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 '피를 흘린다'는 말은 다소 감정적으로 느껴지거나 현실적으로 체감하기 어려운 경우일 수도 있다. 허나 사회는 노동자의 땀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피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현대건설에서 회장을 지내셨고 서울시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을 역임하신 이명박 전 대통령 각하의 초기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에도 실증적으로 증명된 내용이다. 각하께서 남기신 자서전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건설 현장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과정 속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아까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지난 날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2년 반 동안 전 구간에서 발생한 희생자는 77명이었다. 1980년대에는 국내외에서 한 해에 줄잡아 30~4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 또 중동의 거대한 발전소나 항만 시설을 볼 때, 나는 현장에서 죽어 간 아까운 목숨들이 떠올라 숙연해지곤 한다. 그 죽음들이 바로 나를, 우리 사회를, 국가를 지탱하고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다.


- 이명박, <신화는 없다>, 김영사, 2005, 244p.



각하께서 잘 정리하셨다. 무심코 달렸던 경부고속도로에는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77명의 희생 노동자(비공식적으로는 수백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의 피가 서려있는 것이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부산방향 금강휴게소 인근에 세워져 있다) 에런라이크의 말처럼 전세계 곳곳에서 몸으로, 마음으로 피를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이 무수히 많다. 비단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만이 아니라 4대강을 가로막고 있는 흉물스런 보를 바라볼 때도 노동자들의 땀과 피를 기억하게 된다. (관련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252144365&code=940100)


현장에서 죽어간 억울한 넋들의 의미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 정의하신 각하의 치세 동안에도 노동의 지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산 영도에서는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 그를 대표하는 사건이다. 노동자의 입지는 더욱 나빠졌고 이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이재오 전 특임장관은 어느 자리에서 (모택동의 하방운동을 패러디 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는다) 젊은 백수들을 지방의 시골로 내려보내자는 식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략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근대 시절의 머슴부리듯 하던 지주의 입장 정도로 보인다고 하면 나의 짐작이 과도한 것일까?


오늘 한국사회의 '근로자'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너무도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가족을 만날 시간도 반납하고 스스로의 휴식조차 아껴가며 회사와 사회를 위해 근로한다. OECD 최고의 근무시간으로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데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허나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급여가 부족하고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딸린 가족이 없는 홀몸에, 건강하고, 차까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살기가 아주 힘겨울 정도로 빠듯하다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부키, 2012, 268p.



에런라이크가 <노동의 배신>에서 전하는 미국노동자의 현실이 어찌 그리 한국의 현재와 닮았는지 놀랍기만 하다. 워킹푸어는 늘어만 가고 노동을 통해서도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양극화는 심각해지고 있다.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휴식은 꿈도 꾸기 어렵고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비정규 노동자가 수백 만명에 이른다. 노동을 하면 할수록 살림이 나아지기는커녕 빈곤해질 뿐이다. 반면 노동하지 않는 이들의 임대소득이나 불로소득은 자꾸만 늘어나 땀흘리는 이들의 허탈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들에게 노동절이란 그저 빛바랜 개살구 아닐까?


<노동의 배신>의 잠입 취재기나 <4천원 인생>의 체험담을 읽지 않아도 된다. 텍스트에 적힌 노동의 현실은 독자 개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배경처럼 둘러싼 현실과 같기 때문이다. 노동절인 오늘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 편의점 포스에서 물건을 계산해주는 판매원, 음식점에서 서빙을 해주는 웨이트리스, 카페에서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들이 없는 당신의 하루를 상상해 보면 쉬울 것이다. 노동절에도 노동하는 그들의 서비스를 받는 당신도 열에 아홉은 '노동자'다. 그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