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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정치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공짜 점심은 없다

 

(사진: SBS <힐링캠프> 화면 캡쳐)


안철수 전 후보가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다. 무의촌 지역에 의료봉사를 갔던 안 전 후보가 환자들이 잘 낫지 않자 자신의 의술이 모자라다 생각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동네 꼬마들이 무료로 지급했던 알약들로 공기놀이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던 안 전 후보는 그 후로 약에 100원의 돈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환자들이 약을 잘 챙겨먹었고 이후로는 병이 잘 나아서 명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내용은 <안철수의 생각>에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거가 다가오자 투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내 개인적으로 참 답답함을 느끼는 대목은 어느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투표권 자체에 대해 도매금 취급하는 태도를 목격했을 때다. (너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길래 한심해 보이긴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 그냥 무료로 또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에 대한 소유욕이나 책임감은 어렵게 얻거나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에 비해 훨씬 적다. 시급 4,320원씩 받으며 10시간 일해서 번 43,200원을 쓸 때의 신중함과 길가다 주운 5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쓰는 마음이 같을 수 없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대가가 들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소위 횡재했다고 느끼거나 무임승차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투표권처럼 대단히 소중한 대상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일정 이상의 나이가 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투표권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배금주의가 판치는 한국에선 투표권을 돈으로 환산해서 가격표 매겨놓으면 ‘포기한다’는 이야기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이 즐겨 했다는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처럼 (프리드먼이 어떤 의도로 말했건 간에) 대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물과 공기 같은 건 공짜 아니냐 물을 수도 있으나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지금, 이미 물도 사서 마시는데 장차 공기라고 안 사마실까?)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 땀의 대가로 집을 장만하고 차를 사면서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동시에 자신의 노력이 만들어 낸 성과에 보람을 느낀다. 하나하나 눈앞에 이뤄져가는 물질적 결과에 만족하기는 쉽다. 그냥 보이고 만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보이지 않는 가치나 권리, 제도의 결과를 느끼고 그 대가를 고민해 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분명 현실에서 그 가치와 권리, 제도들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고, 대가도 지불했거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곧 있으면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앞으로 5년간 국정을 맡아 운영할 대통령이 내 삶에 미칠 직·간접적인 영향을 생각해보자. 후보들 중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시민 개인이 가지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권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헌법을 중지시키고 국민이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유신시대(이걸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치장했다)나 체육관에 사람 모아다놓고 대통령 등극했던 80년대(광주를 짓밟고 체육관 대통령이 된 사람이 ‘정의사회구현’을 외쳤다)와 비교해보면 된다.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지도자를 자신이 선택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정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란 대가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투표권’에 무임승차한 또다른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스러져간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후불제 민주주의

저자
유시민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9-03-0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대한민국 헌법, 권력의 역주행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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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유시민 전 장관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오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後拂制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돌베게, 2009, 21~22pp.

 

굳이 여기에서 선거권을 획득하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의 역사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민주주의의 이념이 싹트고 남녀와 인종에 차별받지 않는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까지 누군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불과 50~60년에 불과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는 과연 현재 누리고 있는 정치적 권리의 대가를 얼마나 지불했을까? (물론 4.19혁명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다) 또 우리 개개인은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까...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각성한 국민의 뜻과 힘보다는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하는 ‘후불제 민주공화국’이었기에 나치에게 힘없이 자리를 내주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지난 10년간 헌법의 정신과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려는 권력자의 선의에 크게 의존하면서 발전해왔다.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도 시험에 들었다. 민주주의를 존중하려는 선의가 거의 없어 보이는 권력의 도전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돌베게, 2009, 378p.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조들과 선배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대가를 무상으로 누리고 있다면 최소한의 염치를 가졌으면 좋겠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만이 민주주의 국가의 투표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정치적 냉소나 투표 포기는 선배들의 흘린 피와 눈물을 ‘무상’이라고 착각한 처사다. 민주주의의 대가를 기꺼이 치를 용기와 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또 그런 시민들이라야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으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P.S)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