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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되버린 위기, 위기의 끝은 어디일까?

 

사진은 <한겨레21> 922호 첫 면에 실린 탁기형 선임기자의 '이것이 위기다'는 제목의 사진이다. (원문 http://bit.ly/ODmW0w) 보기만 해도 더워지는 에어컨 실외기의 군락을 쳐다보면 비록 냉방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는 사람조차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작년 여름에 벌어진 대규모 정전사태로 전국이 패닉상태에 빠졌던 기억은 이제 에너지 사용을 줄여야할 이유이자 명분이 돼버렸다. 블랙아웃의 경험이 국민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이제 에너지 절약은 당위명제가 되버렸다.

연일 방송과 통신에서는 '에너지 위기'라며 호들갑을 떤다. "전력 예비율 '주의'가 발령됐다", "예비전력 4% 아래로 떨어져" 등의 보도가 이어지고 정부가 부랴부랴 고리 원전 1호기를 재가동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정도면 시골집에서 그늘을 찾아 부채질하고 있을 어르신들조차 불안에 떨 정도다. 분명 전기수급에 있어 엄청난 양의 소비량을 따라가기 어려운 면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저신용사회이긴 하지만 없는 소리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다만 침소봉대 하지는 않았는가 싶은 면은 있다. 위기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간첩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국민들의 안보위기의식을 고취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책임이 있는 정부와 군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간첩신고는 113'을 외우고 다니며 거동수상자를 감시하던 사회는 상호불신과 공포심에 기반한 불안사회다. 그 불안은 통치에 있어 여론을 모으고 이견을 묵살하는데 매우 유용한 카드다. 불안이 크면 클수록 카드의 위력은 더욱 효과적이다.

생각해보면 이제 갓 반세기를 넘긴 대한민국의 역사에 위기는 일상적이었다. 일상이 되버린 위기. 덩달아 공포가 일상이 되버린 사회. 위기라는 이유로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시민들을 협박한다. "안보의식이 무너지면 북괴에 의해 국가가 무너진다", "석유파동 위기이니 보유한 외환을 모두 모아달라", "국제통화기금체제에 들어간 위기니 정리해고를 해야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다", "에너지 위기이니 전력사용을 자제해 달라" 등등.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모습의 위기들이 계속됐다. 위기는 언제나 그렇듯 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제물로 요구한다. 에너지 위기라는 명분으로 요금현실화 카드를 꺼내든 정부는 전기요금 4.9% 인상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누군가에게는 그깟 몇 천원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 몇 천원이나 되는 돈이 위기의 감투를 쓰고 인상안 통과의 임명장을 받아버린다.

위기라는 이름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안보위기라는 이유로 시민들을 36개월씩 조인트 까이는 군생활 시킨 나라의 지도자들은 '면제'가 아니면 오히려 이상하다. 석유파동이라며 외환부족을 호소했던 정부의 지도자들은 앞에서는 막걸리를 마셨지만 뒤에서는 요정 안에 숨어서 수입양주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 알파벳도 모르는 촌로까지 IMF라는 세 글자는 정확히 발음할 수 있게 만든 경제위기 중에 국민들은 아기 돌반지까지 내서 나라구하겠다고 줄 서는 동안 누군가는 치솟은 금리에 즐거워하며 룸살롱에서 "지금 이대로!"를 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며 경기를 살리겠다는 명분 아래 강행된 4대강 정비사업은 분명 일자리 창출의 주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24조원이 투입되고도 실업자가 줄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난 재정부담 때문에 안 그래도 얇아진 국민들 호주머니를 교묘히 간접세 등으로 털어가고 있다. 위기에 따른 희생과 부담은 전혀 공평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위기는 존재한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약자와 소수자를 '대를 위한 당연한 소의 희생'이 당연시 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추적자>에서 백홍석(손현주 분)의 딸을 죽인 강동윤(김상중 분)이 "마차가 멀리 가다보면 바퀴에 깔려죽는 벌레도 있는 법입니다"고 내뱉은 말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에너지 위기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송전탑을 세우고 이에 반대하는 어느 시골마을 노인들을 용역과 경찰이 진압하고 무더위에 노인들이 쓰러져 나가는 동안에도 에어컨 실외기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시원해진 실내에서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야?"라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어느 철학자의 말까지 인용하는데서는 참기힘든 분노가 일어난다. 그 철학자가 왜 공리주의 철학을 말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한채 박제된 경구로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 시키는 몰골에서 '위기조장과 그 효과에 대한 메커니즘'이 뿌리내린 토양이 어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위기였던 시대, 위기의 시대, 그리고 앞으로 위기일 시대. 그 위기를 틈타 위기극복의 제단에 제물로 오를 그 누군가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제단 아래 사람들에게 '위기'를 입에 담는 자들이 제단에 바쳐진 역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문명화 된 '야만의 사회'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