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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한국문학

[우리의 소원은 전쟁 - 장강명] 당신은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났나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어떤 존재의 크기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기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무뎌지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 중에는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릴 적 축구를 좋아했던 저는 주력을 높이고자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모래주머니를 하고 있으면 뛰는 것은 물론이고 걷기도 힘듭니다. 불편한데도 이것이 신기한 게, 한참을 하고 다니면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무뎌집니다. 안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감각이 무져지는 것입니다. 물론 벗고 나면 훨훨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지는 효과가 있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감각은 예민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참 무딥니다. 자극이 지속적으로 가해진다면 특히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장강명 작가의 신작 『우리의 소원은 전쟁』의 주제를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한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우리의 소원은?"이란 질문에 "통일!"이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끔 교육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당위적인 것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북한의 반인권 상황과 세습독재체제를 비판하시는 분들도 '통일'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그 당위성을 인정하니까요. 그만큼 우리는 통일문제에 대해서 무뎌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일종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민족의 높은 이상속에 그려지는 통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로 강림하면 그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 날이 오면 민족의 화해와 대단결이 이뤄지고 동북아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할까요? 남한의 잉여자본이 미개발된 북한의 기반시설 건설과 자원개발에 투입돼 경제가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할까요? 과연 그러할까요.



우리의 소원은 전쟁
국내도서
저자 : 장강명
출판 : 예담 201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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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그런 통일 후 모습 중 하나를 그려본 작품입니다. 물론 순전히 작가 한 사람의 상상력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위해 여러 논문과 전문기사문, 문학작품과 영화들을 참고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한국사회의 어딘가에서는 언제 도둑과 같이 찾아올지 모르는 그 날을 대비한 학술적 연구와 대비가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겠죠. 통일의 그 날이 온 다음의 한반도를 한 번쯤 생각해보고자 하는 독자들께서는, 찾는데 수고가 많이 들고 읽기에도 불편한 그 자료들을 구해서 보시는 것보다 이 작품 한 편을 읽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딱딱한 자료들보다 재미가 있고, 분량도 훨씬 적을테니까요.


작품의 배경은 북한의 김씨 왕조가 무너진 한반도입니다. 하지만 남북한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상황은 아닙니다. 북한지역에서 김씨 왕조 대신 통일과도정부가 수립되고 조선인민군이 해체된 대신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들어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전히 휴전선 지역을 통제하며 남쪽으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되는 상황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치안이 부재한 북한 지역에는 폭력조직이 기승을 부리고 조선인민군 출신들로 이뤄진 군벌이 일정지역을 통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환상으로 가졌던 통일의 모습은 아닙니다.


아수라장 같은 북한 내에서도 아수라장인 장풍군이란 곳이 작품의 주무대가 됩니다. 여기에 각자 다른 출신과 환경에서 살아온 여려 명의 중심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품의 내용은 독자들께서 책을 통해 확인해 주시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중심인물들의 캐릭터를 조금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한국군 통역장교로 강민준 대위가 등장합니다. 원래 게임회사 기획자이자 예비역 대위지만 급작스런 통일과 장교부족으로 군대를 다시 오게된, 한국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운명에 처한 인물입니다. 그가 통역을 맡은 이가 평화유지군 말레이시아군 장교 쉐인 롱 대위입니다. 여성 장교지만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장풍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는 최태룡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휘하에 북한 특작부대 출신으로 알려진 계영묵, 조희순, 박현길이라는 자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업은 마약밀매지요. 그런 최태룡에게 이용당하고 죽임을 당한 아들과 남편을 둔 두 여인, 박우희와 문금옥은 복수를 꿈꾸고 이들을 돕는 북한 상류층 출신 아가씨 은명화와 북한 특작부대 출신 장리철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은명화는 김씨 왕조가 무너지면서 한 순간에 사회최상층에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쳤고, 장리철은 조선인민군이 해체되면서 낙오하자 동료들을 찾아나선 상황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통일'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또 솔직하게 다룬 강민준 대위와 쉐인 롱 대위의 대화에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은 대목이었다고 해두죠. 그 동안 터부시 되어왔던 통일의 대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 볼 수 있는 지점이었으니까요. 다분히 한국인의 감정과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강민준 대위와 그런 그의 이야기를 제3자의 눈으로 냉철하게 보고 반문하는 쉐인 롱 대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무뎌지고 매몰된 우리의 사고를 벗어날 기회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조금 요약해서 보시죠.


강: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영어 좀 한다는 이유로 군대에 두 번 끌려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롱: 조국의 미래와 민족의 통일에 봉사하는 기회 아니고요?

강: 아,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십쇼. 요즘 남한 젊은이들은 '이러느니 차라리 북한과 전쟁을 벌였어야 했다'는 이야기들을 공공연히 합니다. 전쟁을 했더라면 섬멸전이 벌어졌을 거 아닙니까?

롱: 전면전이 벌어졌더라면 남한 측 피해도 꽤 있지 않았을까요?

강: 그렇지 않았을걸요. 북한 군대는 제대로 가동되는 장비도 몇 없었고, 군인들도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사상자는 대부분 북한 쪽에서 발생했을 거예요.

롱: 전쟁이 나지 않아 남한 군인 몇 사람이 평화유지군 활동하다 죽는 건 안되고, 전쟁이 나서 북한 사람 수천수만 명이 한꺼번에 많이 죽는 건 괜찮다?


- 장강명, 『우리의 소원은 전쟁』, 예담, 2016, 721~724pp.


롱 대위의 반문에서 우리가 가진 막연한 환상과 세뇌된 통일의 의미가 얼마나 허구이며 무의미했는지 드러납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바치기에 우리는 너무 영악해졌습니다. 그럴만한 희생을 바칠 이유를 갖고 있지 않으니 동포라는 위선의 껍데기는 어디갔는지 '섬멸'이나 '전쟁' 같은 무서운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지요. 분단되어 차단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이웃집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느끼는 감정적 거리만큼도 되지 정도로 멀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럼에도 '조국과 민족'같은 단어에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잘 따르는 한국인들의 정서와 분위기는 제3자인 롱 대위에게는 분명 이상해 보였을 겁니다. 그녀의 지적은 민족과 통일 문제만 나오면 비장해지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냉정함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꼭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두 나라로 떨어뜨려놓고 나니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대로 똘똘 뭉쳐서 선진국이 되었고,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 없이 자기 힘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왔어요.


.......


남한의 통일론자들이 통일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신문에서 몇 번 봤어요. 저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더군요. 특히 남한과 북한이 합쳐지면 내수 시장이 커지고 북한의 싼 임금 덕분에 남한 기업들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얘기. 그건 남한 자본이 북한 사람들을 노동자로, 소비자로도 이용해 먹겠다는 얘기죠."


- 장강명, 『우리의 소원은 전쟁』, 예담, 2016, 726~727pp.


그녀의 지적에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맹목적인 통일지상론자들은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나름 경제적 합리성을 근거로 드는 통일론자들은 또 뭐라고 말할까요. 여하간 우리가 주장하는 것들이 반복적이고 세뇌된 강박적 이유로 그러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대목입니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친인척간의 거리도 멀어지는 요즘 세태에서 '우리 민족'같이 낭만적인 이유를 근거로 대는 것은 너무 고루한 위선이 아닌지 말입니다. 아니면 차라리 '계산기 두들겨 보니 타산이 맞다'는 위악이 더 나은 건가요?


나 혹은 나를 둘러싼 몇몇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그들 사이에서 세계의 전부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동굴의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장 제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세계의 모습은 판이할 것이며 당장 절대적인 세계상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찰하며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소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확실한 우리의 의식과 감각을 극복하고, 보다 확실한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날'이 도둑과 같이 찾아오는 그 때를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아. 앞서 맨 처음 말씀드린 '모래주머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드리고 정리하려 합니다. 제 나름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했기에 애용하던 모래주머니를 어느 순간부터 풀었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훈련 방법으로 돌아갔지요. 그것은 주변에서 저를 보고 조언해주신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관절에 무리를 주어 장기적인 훈련을 어렵게 하고 부상을 일으키거나, 풀고난 뒤 신체균형이 무너져 이를 조정하는 것도 무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제로도 조언과 같은 현상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기에 제 방식을 바꾼 겁니다. 만약 모래주머니 훈련법을 고집해 스스로를 세뇌하며 유지했다면 어땠을까요? 몸에 문제가 생기고도 아집을 부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약하고 어리석으며, 따라서 스스로 성찰하고 서로 봐주지 않으면 금새 엉뚱한 생각에 빠지기 마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