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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한국문학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일하는 당신을 스트레스 받게 하는 것의 정체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국내도서
저자 : 이문열(Yi Munyo)
출판 : 민음사 200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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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 소속돼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학생과 교사라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군대에는 장교와 부사관, 사병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직장에는 오너와 중간관리자, 사원의 역할을 가진 사람이 각각 존재하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일하는 시간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삶의 질 역시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학교생활이던, 군대생활이던, 직장생활이던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지요. 


대학생활과 군대생활, 직장생활을 직접 경험해 보면서 이들이 쉽지 않게 만드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것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딱 짚어내기는 어려웠지만 직관적으로 '군대나 학교나 직장이나 다 똑같아'라는 평가를 자주 내렸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신 독자님들이 많으실 것이라 추측합니다. 4월 6일자 프라임경제 기사 「직장인, 대인관계로 스트레스 가장 많이 받아」라는 기사를 같이 한 번 보시죠. (원문 기사는 기사 제목을 클릭해 보시면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원인에 대한 조사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주 원인에 대해 복수응답으로 조사한 결과, 일에 대한 만족도나 업무량, 연봉수준 보다 '상사나 동료와의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53.0%로 가장 높았다.[각주:1]


즉, 한국인들은 업무량이나 업무강도, 업무에 대한 만족도 아니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내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인간관계로 힘들어 하는 사람 참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범주는 너무나 크고 넓어서 자칫 모호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인간관계의 어떤 면이 당신을 힘들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설명해 내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혹은 군인으로서 느끼는 대인관계 스트레스의 원인을 딱 이것이라 진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것도 그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직내 '권위주의'라는 녀석입니다. 이 권위라는 녀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며 조직의 각 구성원을 구속합니다. 밖에서 만났더라면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것 같은 사람 간의 관계도 권위주의적 조직 내에서 이뤄진다면 비극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권위주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전적으로 권위주의는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라고 정의돼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 말이지요. 권위주의적인 조직에 들어가보면 그들은 스스로 '우리는 보수적인 조직'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적이라는 말이 가진 부정적 뉘앙스를 보수적이라는 전혀 엉뚱한 단어로 희석시키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스스로는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 수많은 조직은 실제 오너 한 명의 권위나 교장 혹은 지휘관 한 명의 권위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조직원들이 실제로 거기에 충성하는 권위주의적 조직일 뿐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런 권위주의적 사회의 맨얼굴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미생」이 시청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조직들 내에 잔존하고 있는 권위주의가 일그러지면 일그러질수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더욱 관심을 받는 이 아이러니는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가 '나는 이 책이 더이상 읽혀지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고 했지만 더욱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권위주의의 해체가 곧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절차적 민주화를 이뤄낸 것을 마치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것으로 착각했던 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권위주의는 단 한 번도 타파된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가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지금의 우리가 느껴온 착각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 곁에 앉아 있던 키 큰 아이 둘이 일어나 내게로 왔다.

"일어나, 임마!"

둘 다 금세 덤벼들기라도 할 듯 성난 기색이었다.

"임마, 엄석대가 오라고 하잖아? 급장이."

....

무언가 대단히 높고 귀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그래서 당연히 존경과 복종을 바쳐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

"너희들은 뭐야?"

"나는 체육부장이고 쟨 미화부장이다."

"그런데 너희가 왜......"

"엄석대가, 급장이 와 보라고 하잖아?"

내가 그에게 가서 대령해야 되는 유일한 이유가 그가 엄석대이고 급장이기 때문이란 걸 두 번이나 되풀이 듣게 되자 비로소 나는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민음사, 2005, 13~14pp.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일상의 권위주의가 전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공고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 장면은 학교와 군대, 직장 등 우리 사회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절대권위를 가진 사람과 그를 충심으로 보좌하는 측근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하는 다수. 위 장면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분명 한병태와 체육부장, 미화부장 간의 아웅다웅을 지켜보면서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학생들이 있었겠지요. 침묵하는 다수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씁쓸해지는 것은 권위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비애겠지요. 이 장면에서 권위주의에 짓눌려 사는 일상에서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떤 일을 맡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명령과 지시에 (그것이 설사 부당하고 불법이 될 지라도) 절대 복종하거나 특정 인물에게 충성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대인관계의 스트레스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권위주의에 절대복종하는 중간관리자급 상사나 교사, 지휘관이 여러분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려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야, 그냥 까라면 까는거야"라고 다그치던 상사 혹은 동료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 까라는지에 대한 동의 혹은 합의는 생략한채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 문화는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대의 속도전에는 어울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와 같은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성과 합리를 중요시하는, 잘 교육된 세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런 권위주의는 냉소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낡은 유물이 연명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 역시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경제민주화라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요. 한국 보수세력이 좋아하는 미국만 보더라도 이미 19세기 말에 등장해서 20세기 초에는 입법이 되었던 그 이야기가 우리는 21세기 초인데도 아직 논의 중인 것입니다. 비단 경제분야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전통의 명망있는 국제영화제에 지자체장이 끼어들어 진행을 좌지우지하려는 시도 같은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권위주의의 잔재들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것은 일상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조직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권위주의의 문제는 개인의 스트레스와 고통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는 인물의 의지나 조직 이기주의가 공공의 선과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이 비밀을 외부에 공개한다면, 그래서 이 문제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용기를 가져야 할까요?


"너 석대에게 라이터 뺏겼지?"

"뺏기지는 않았지만..... 빌려줬어."

"그게 바로 뺏긴 거 아냐? 더구나 너희 아버지가 낼 돌아오신다며?"

"동생보고 아무 말 못하게 하지 뭐."

"그럼 넌 아버지의 라이터를 훔쳐 석대에게 바치겠단 말이니? 너희 아버지가 그 귀한 걸 잃어버리고 가만있을까?"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야. 그 라이터는 일본 계신 삼촌이 아버지께 선물로 주신 거거든. 그렇지만 어떻게 해? 석대가 달라는데."

"빌려준 거라며? 빌려줬음 돌려받으면 되잖아?"

"안 돌려줄거야."

"그래? 그럼 그게 어디 빌려준 거야? 뺏긴 거지."

"......"

"그러지말고~ 차라리 선생님께 일르지 그래? 아버지한테 혼나는 것 보담은 낫잖아?"

"건 안돼!"

병조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고개까지 세차게 흔드는 게 여간 강경하지 않았다.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민음사, 2005, 36~37pp.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도전마저 곧 배신으로 치부되지요.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양심을 걸고 내부고발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조직 내부에서는 당연히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사회에서도 '개인적인 불만이 있거나 무슨 거래를 위해서 그러는 것 아냐'라는 음모론이 판을 쳤지요. 결국 그들은 보호받지 못했고 힘겨운 삶으로 내몰렸습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은 바로 개인에게 있어 보호받지 못하고 파멸한다는 비겁한 가르침을 주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공포는 바로 위의 글에서 병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보자면 철저한 복종을 요구받는 것과 같습니다.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에 대한 고려를 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인체에 유독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회사가 안전성 증거라고 내놓은 연구결과를 내놓은 대학교 연구팀의 팀원들이 처한 상황 같습니다. 그들은 이 연구결과가 과학자로서의 양심과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진실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수행한 그들이 이런 결과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연구팀의 침묵 앞에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거나 큰 장애를 입은 사람들의 가족들과 시민들은 진실을 요구하지만, 연구팀 내부의 팀원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권위에 먼저 복종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 김민섭 씨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지난 주말에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그램을 보니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의 폭력 문제와 기수문화의 폐혜를 다루고 있더군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의 폭력과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학의 모습이 아니라 흡사 폭력이 용인되고 계급문화가 고착된 옛시절 병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의 해체가 부분적으로 이뤄지던 시절에 대한 강한 반동이 사회를 급격하게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시키는 현상에 대한 걱정은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학생에게는 자신의 일인 공부 외에도 서열문화와 각종 부조리에 적응해야 하는 과업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권위주의는 사회의 곳곳에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한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일하는 건 그럭저럭 견딜만 한데 다른 문제로 너무 힘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볼까 해"라는 해답은 이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마치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등장하는 두 번째 지옥처럼 어디로 가도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편, 중간관리자나 지휘관, 교수, 선배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통제하려 드는 권위주의는 이미 사회의 골수에까지 스며 있습니다. 일을 해서 먹고 살겠다는 결심은 이미 권위주의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일하는 시간'이 권위주의로 철저히 포위돼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스트레스는 필요악처럼 달고 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변화를 원하십니까?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내가 깨 있는 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하는 시간을 권위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분명 변화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리 개개인에게는 그럴 능력도 시간도, 자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내 의지로 충분히 가능하고 딱히 시간과 자금이 소요되지도 않습니다.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같은 이명박류 꼰대이즘을 들먹이는 직장상사가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그런 낡아빠진 권위의식를 청산하는데는 그 사람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런 작은 이명박들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의 권위주의 해체에는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물론 사람 잘 안변하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남의 문제에 이어 나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조직의 권위에 순종하는 나라면 남이 보았을 때 나도 이미 권위주의의 공범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동료와 하급자에게 어떤 인물일까요? 나의 행동양식과 판단은 그들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나는 탈권위적이다"고 자신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의 권위주의를 맹종하고 성찰하지 않은 내가 권위주의의 지배에 기여한 바가 정녕 없는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대인관계 스트레스'. 그리고 그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권위주의.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대인관계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첩경이며, 그것이 일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청산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결정권을 쥔 사람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문화와 분위기라는 것은 대중의 의식과 인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작은 그 대중 가운데 나부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한다면 분명 당신의 하급자나 동료부터 당신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그들이 느끼는 세상과 환경의 변화로 인식하게 될 것이니까요. 한나 아렌트 선생은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주-칼 아돌프 아이히만)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391p.


  1. 프라임경제 4월 6일자 기사, 「직장인, 대인관계로 스트레스 가장 많이 받아」, 김경태 기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