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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외국문학

[80일간의 세계일주 -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꿈꾸는 자, 꿈을 이루리라

80일간의 세계 일주
국내도서
저자 : 쥘 베른(Jules Verne) / 고정아역
출판 : 열린책들 201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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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를 살펴보니 하늘이 뿌옇군요. 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된데다 구름까지 껴서 햇볕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했지만 꽃놀이의 즐거움이 반감될 것 같은 날씨입니다. 날씨만 그런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당장 진학하고 취업할 문제에서부터 일반인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노후문제까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지요. 앞길에 구름이 가득 껴서 불안감만 가득할 뿐입니다. 선거가 코 앞에 닥쳐있지만 정치가 내 삶을 바꿔줄거란 순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불안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짚어지고 사느라 고개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꿈과 도전이라는 말은 사치가 되버렸지요. 초등생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건물주'라고 대답한다는 무거운 현실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아동소설이라고 오해받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꺼내본 것은 억압된 꿈과 도전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나 봅니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읽으며 가슴 뛰었던 그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해외여행 자유화가 막 이루어졌던 시대였는지라 배낭여행 같은 가슴설레는 도전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좁디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전세계를 직접 누비며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과 상상력은 폭발할 지경이었지요. 생경한 것과 낯선 곳들에 대한 동경이 취업이나 먹고사는 업에 짓눌린 지금,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아시다시피 쥘 베른은 SF소설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SF소설을 좋아하는지라 이 작가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중 최고는 「해저2만리」라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80일간의 세계일주」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쯤을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에 하나쯤 들어갈만한 미션이 바로 '세계일주' 아닐까요? 여객기가 발달해서 하루도 걸리지 않아 대륙과 대륙 사이를 오가는 오늘에야 그 감동이 덜하겠지만 19세기 말의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그 거대한 계획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뭐랄까요. 비행기로 슁~하고 날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말을 타고 대륙을 달려간다던지, 대륙횡단열차로 몇 주간 쉬지 않고 달린다던지, 거대한 여객선으로 몇 달이 걸려 대양을 건넌다던지 이런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상상이 잘 안되신다면 세계지도나 펼쳐놓거나 구글어스를 가동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런던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를 거쳐 이태리 토리노를 지나 브린디시에서 배로 수에즈 운하로 향합니다. 수에즈 운하에서 다시 여객선으로 홍해를 건너 예멘을 지나 인도양으로 들어갑니다. 인도의 뭄바이에 도착하면 열차로 정글과 높은 산을 통과해서 동부의 콜커타에 도착합니다. 콜커다에서 다시 배로 싱가포르를 스쳐 말라카해협을 통과하여 홍콩에 기항합니다. 홍콩에서 다시 일본 요코하마에 기항한 뒤 여객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미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까지 갑니다. 여기서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미 동부의 뉴욕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여객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영국 리버풀항에 도착합니다. 리버풀에서 런던까지 열차를 타고 달려서 약속장소에 도착하면 세계일주는 끝이납니다. 단, 출발일로부터 80일 이내에 말이죠.


잘 따라오셨습니까? 글로 적어봐도 긴 편이지요.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가능한 최단시간이 아마 80일쯤 됐나 봅니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사교클럽에서 동료 회원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내기를 하게됩니다. 포그는 80일만에 세계일주가 가능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내기 당일 저녁 런던을 출발합니다. 세계일주 여행의 시작이지요. 물론 여기에는 전재산을 건 도박이 걸려있기도 합니다. 당일 포그 씨의 하인이 된 파스파르투 역시 영문도 모른채 주인을 따라 이 무모한 여행에 동행하게 됩니다. 


19세기 말의 세계는 산업혁명의 결과가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지리적으로 인류의 영역폭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구요. 그런 인간이성의 자신감은 말수 적은 포그 씨의 태도와 사고방식으로도 충분히 표현됩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과학만능주의 같은 것이 자신감을 넘어 약간의 오만까지도 느껴질 정도지요.


그 말을 듣고 포그 씨는, 아우다 부인이 걱정할 일은 없으며, 모든 일이 수학적으로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학적이라는 말은 포그 씨가 즐겨 쓰는 말이었다.


-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80일간의 세계일주」, 열린책들, 2010, 139p.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엄밀함과 정교함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포그 씨의 낙관주의는 당시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물론 인류는 그 이후의 역사와 경험을 통해 과학만능주의가 가져온 폐해와 그 공포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환경파괴라던지 핵무기의 등장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포그 씨의 과학적인 자신감은 실제 여행에서 여러번 좌절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인도를 횡단하는 열차는 심지어 완공이 되지 않아 중간의 노선이 끊어져 있기도 했고, 간발의 차로 배를 놓치기도 하는 등 여행은 곳곳에서 계획과 어긋납니다. 하지만 더욱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이성을 중시하고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이 무뚝뚝한 영국 신사가 전재산이 걸린 내기 중에서도 결코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늙은 신랑과 함께 산제물로 태워질 뻔한 위기에 처한 젊은 신부 아우다 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일정을 미루고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구출작전을 펼치는가 하면, 미대륙 횡단열차를 습격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납치된 하인 파스파르투를 구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구출작전에 동참하는 등 말입니다. 냉정하고 침착한데다 인간미까지 잃지 않는 이 남자, 꽤 매력적이지 않으신지요?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쓰여진 시대의 유럽인들이 가진 사고방식의 한계때문에 곳곳에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잘 걸러서 읽는다면 흥미와 긴장감만큼은 역시 최고였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홀로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증명한 포그 씨의 용기와 추진력은 지금과 같은 때 큰 자극이 됩니다. 포그 씨만한 재산을 가졌다면 명예나 도전보다는 빌딩을 더 산다던지 뜨는 주식 찾기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특히 말이지요.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간신히 성공하고 난 이후에도 인류는 도전과 모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전한 꿈은 현실이 됐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옮긴이인 고정아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쥘 베른의 작품에 등장한 상상의 것들 중 지금까지 인류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들이 위의 표와 같습니다. 상당히 많지요? 쥘 베른과 그의 독자들이 상상하고 꿈꿨던 것들이 100여년에 걸쳐 우리에게는 거의 다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는 인류의 편익을 증진하고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들도 있지만 인류를 불행에 빠뜨리고 고통받게 한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쥘 베른의 상상력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의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도출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개한 벚꽃과 목련, 개나리 같은 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겨울이 생각납니다. 흰 눈으로 덮여있던 그 겨울에 가지만 앙상한 이 나무에서 과연 꽃이 필 수 있을까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다시 봄으로 흐를 것이고 앙상한 가지 안에는 먼 봄날 꽃으로 만개할 생명의 꿈이 잠자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같은 만개의 날을 위해서 벚나무는, 개나리나무는, 그리고 목련나무는 그렇게 춥고 비루한 하루하루를 버텨냈는지 모릅니다. 꿈은 그렇게 비루함을 양분 삼아 때를 기다렸나 봅니다. 쥘 베른의 꿈이 100여년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오늘을 기다렸듯이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역시 비루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당장 떨어진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고민에서부터 취업을 위한 각종 활동들, 직장생활 중에 벌어지는 암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육아와 가정생활의 부담을 견뎌내기 위한 인내 등등으로 점철된 일상일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배경음악에 노오력하는 모습 몇 컷으로 끝나는 일도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꾸준하게 해야만 간신히 조그만 성과를 손에 쥐는 정도가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일상에 매몰되고는 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모두가 겨울날의 벚꽃나무, 개나리나무, 목련나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은 자기의 때가 아닌 것 뿐이지요. 추운 겨울을 나고 있지만 모두의 안에는 꿈과 희망의 새싹이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그 새싹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리며 살아숨쉬는 상상력과 희망이 필요할 것이구요. 먹고 살기 팍팍한 시대일수록 더욱 필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그 씨의 도전과 쥘 베른의 상상력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님들도 가슴 속에 (지금은)불가능한 (하지만 나중에는 실현될) 꿈을 하나쯤 품고 사시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