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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외국문학

[종이달紙の月 - 가쿠다 미쓰요] "가짜라 해도 좋아. 행복할 수 있다면."



종이달

저자
가쿠타 미쓰요, 가쿠다 미쓰요 지음
출판사
예담 | 2014-12-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 NHK 드라마화, 미야자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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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동명의 영화 스포가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추석 명절은 잘들 보내셨는지요? 대체휴무가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주말이 낀 명절이라 교통체증도 심하고 짧았던 연휴였던 것 같습니다. 추석을 맞아 라디오 방송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명절에 여성들이 가장 화나고 힘든 걸 이야기 해보라니 1위는 음식장만하고 있을 때 텔레비전 보고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남성들은 장시간의 운전과 명절맞이 각종 지출들이라고 답했구요. 문화적인 성차별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각각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 명절에 저는 일본소설인 <종이달>을 읽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명절에는 일본소설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한국문화 이면의 일그러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명절이란 기간을 정신적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지요. <종이달>은 그렇게 선택한 이번 명절의 일본소설이었습니다. 헌데 기대 이상으로 주인공인 우메자와 리카라는 여성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성차별과 경제적인 어려움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종이달>은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을만큼 유명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기도 했지요. 평범했던 주부가 은행의 시간제 직원이 된 이후 거액의 예금을 횡령하고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소재는 일반관객과 독자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여주는 소위 막장 소재 아니겠습니까. 충분히 자극적이고 흥미가 가는 소재고 이야기지요. 다만 거기에서 끝났다면 오늘 이렇게 독자님께 소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영화 <종이달>과 소설 <종이달>를 둘 다 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종이달>의 주요 스토리 라인은 앞서 말씀드린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평범한 40대 초반의 주부가 은행의 시간제 직원이 되고, 고타라는 20대 청년과 바람이 나서 한참 연애를 하는가 하면, 거액의 예금을 횡령해서 결국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영화 <종이달>은 이런 스토리라인에 충실합니다. 미야자와 리에라는 일본 여배우가 펼치는 베드신과 횡령장면의 디테일한 연출 등이 그렇지요. 영화를 보고 나서 책으로 작품을 읽었는데 '같은 내용 다른 연출'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 내면의 흐름과 그녀 주변인물들의 모습들이 오히려 텍스트에 살아있어 훨씬 작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소설의 비교를 하고자 함이 아니니 다시 소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독자들은 '왜 그녀는 거액을 횡령했는가?'에 관심이 가실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다'가 저의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 내에서 말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고타라는 청년과 호텔스위트룸에서 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그의 빚까지 갚아줄 정도였으니 지출이 엄청 많았겠지요. 작품 내에서도 그런 리카의 행동을 두고 '남자에게 공납을 했다'고 수군거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리카의 외적인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만 두고 말한 것이지 그녀 내면의 행동요인을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힌트가 될만한 대목이 있기는 합니다.


주부인 나는 나의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 리카는 일찍이 직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메자와 리카는 내 속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가쿠다 미쓰요 지음, 권남희 옮김, <종이달>, 예담, 2014, 78p.


길던 짧던 삶을 살아온 사람은 지난 날의 스스로를 반추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 어느 학교를 다녔고 누군가를 만났고 어느 활동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내가 완성돼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끔 그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온전한 나를 찾을 시간 없이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게끔 살라고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이면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대학생이 되면 이제 취업을 목표로, 직장을 잡으면 이제 결혼을 목표로, 결혼을 하면 이제 2세의 출산과 양육을 목표로, 2세가 탄생하고 크기 시작하면 이제 교육을 통한 경쟁의 승리를 목표로 숨가쁘게 달리게 됩니다. 그 사이에 진정한 나는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고등학생인 나? 대학생인 나? 직장인인 나?


우리는 온전한 내가 아닌 나의 일부인 나로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발견조차 하지 못한 나는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서 은밀한 욕망을 간직한 채 발현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리카는 우연한 기회에 발현의 기회를 맞았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생기지 않는 아이, 자상하고 무난한 성격이지만 권위를 내세워 자신보다 우월해 보이려는 남편, 주부로서 자아를 찾지 못하는 자신 등 외부적인 요인들은 내면에 잠들어있던 우메자와 리카를 현실로 소환한 촉매의 역할을 했을 것이구요. 리카를 둘러싼 환경과 리카의 과거, 리카 내면의 복잡미묘한 심리흐름을 종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결핍에 허덕이고 공허함에 쓸쓸해하던 리카의 심리는 매우 섬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필력 좋은 여류작가가 묘사한 여자 주인공의 심리적 기제는 (솔직히) 이해하는데 한계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구멍이 뻥뻥 뚫려있던 리카의 가슴에 젊고, 순수하고, 철없는 청년이 와서 꽂히기도 했고, 돈이 가득 차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돈은 단순히 큰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주는 여유로움, 돈이 제공하는 호의, 돈에 따라오는 친절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리카는 황금연휴 동안 줄곧 들떠 있었다. 손에 닿는 것도 폭신폭신하게 느껴지고, 발밑도 폭신폭신하고, 주위 사물의 색깔도 사랑스러웠다.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 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 가쿠다 미쓰요 지음, 권남희 옮김, <종이달>, 예담, 2014, 290p.


이 정도 이야기하면 그녀가 왜 그렇게 큰 돈을 횡령했는지, 또 남편을 배신하는 행동을 했는지 약간은 설명이 됩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으면서 큰 것을 얻기 위해 실제로 현실에서 큰 것들을 두려움 없이 갖고 훔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리카라는 여자의 마음을 오롯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앞서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래서 남자와 여자는 평행선을 마주하고 달리는 파트너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소설은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임과 동시에 거품경제가 무너져 내리던 당시 일본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의 무제한의 신용을 남발함으로서 과소비를 진작시키고 빚으로 경제를 운영하던 미친 번영의 시대와 그 끝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가정의 파탄과 개인의 소외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바로 아래 소개해 드린 대목을 보시면 공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의 출처는 마키코의 어머니가 아니라, 여성 대상의 저금리를 노래하는 소비자금융이란 것을 안 것은 올해 초였다. 마키코가 부재중일 때 우편함에 있는 독촉장을 발견한 것이다. 3,4개월 동안 마키코가 사용한 돈은 100만 엔 정도였지만, 마키코는 그걸 갚으려고 다른 소비자금융에서도 대출해서 대출금 총액은 200만 엔에 가까웠다. 


...


모든 빚을 청산한 날 밤, 아이들이 잠든 뒤, 가즈키는 마키코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교육에 관한, 경제에 관한 가치관이 너무 다르다, 너하고 살아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했다. 마키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가즈키를 바라보았다.


- 가쿠다 미쓰요 지음, 권남희 옮김, <종이달>, 예담, 2014, 372~374pp.


요새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도 여성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일 수백 만원을 빌려준다는 '미즈XX'같은 업체가 연일 광고에 열심이죠. 우리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과거에 왜 이리 기시감이 드는 것인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옮긴이의 글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사진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사진관에서 가짜 초승달 모양을 만들어서 배경으로 찍은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종의 유행처럼요. 지금이야 휴대폰으로도 손쉽게 사진을 찍지만 예전에는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 찍는 것이 일종의 큰 행사같았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런 상상을 해보면 아마 가짜 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무척 행복했을 겁니다. 활짝 웃으며 행복을 자랑하는 듯한 포즈도 취했을 것이구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종이달'이라고 하면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설명을 듣고 종이달이라는 제목은 무척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짜'와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니까요. 미래에 올 것이라 확신하는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거나 학대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정말로 과거에 묻혀 흘러가버린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그리며 현실감각이 결여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요. 무엇인가에 완전히 홀리거나 미쳐서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전에 참된 행복을 경험했던 것일까요. 미래에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행복은 종이달과 같아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아래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복을 즐기고 있는지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종이달은 가짜가 될 수도 있고, 진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이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사람의 몫일 뿐이니까요. 독자님의 배경에 달려있는 종이달은 어떤 모양인지요? 그 사진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