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배운다 - 징비록 시리즈 1편] (이번 시리즈는 총 3편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나의 타고난 사람됨이 원래 그래서인지 무척 게으르다. 책을 읽는데도 게으름이 심한데, 특히나 한동안 게으름을 피우고 나서야 책을 폭식하는 버릇이 있다. 폭식을 하는 동안은 백지가 먹물을 흡수하듯 책을 읽고 받아들이고 되씹는다. 그러다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쓰던 리뷰도 손을 놓기 일쑤다. 계산해보니 거의 한 달 가까이를 그랬다. 이제서야 하는 것도 꾸준히 쌓여온 게으름이 더이상 쌓일 공간이 없어서 터져나온 것이다.
요새 한국방송공사에서 <징비록>이라는 드라마가 방영중인 것 같다. 몇 번 봤는데 김상중 씨가 무엇이 또 '알고 싶어서'인지 <징비록>에 출연해서 똑같은 어조로 왕을 추궁하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가 극중 서애 류성룡 선생의 배역을 맡았는데 <징비록>이라는 책을 쓴 인물이 바로 이 류성룡 선생이다. 명량을 보고 나서 '징비록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게을러서 이제야 읽어봤다. (사실 난중일기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시다시피 난중일기는 분량의 50%가 '맑음, 흐림, 장杖을 쳤다' 등이라 재미가 없어서... 징비록으로 바꿨다) 징비록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내가 선택한 서해문집판 징비록은 <징비록> 상,하 두 권과 <녹후잡기>로 이뤄진 판본을 기본으로 번역됐다. 보너스로 <서애집>에서 임란과 관련된 부분도 발췌돼 수록돼 있으니 임진왜란에 관심이 큰 독자에게는 더욱 좋겠다.
- 류성룡 선생은 누구인가?
일단 서애 류성룡 선생을 소개해 보려 한다. 인물을 모르고 <징비록>을 읽는다면 그 재미가 한참 떨어질테니 말이다. 먼저 류성룡 선생의 출생과 성장기는 생략한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하면서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글을 한 번 훑어보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는 법이 없다'고 쓰여 있을 정도니 매우 명석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일반에게는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시절 서울로 이주해서 살 때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류성룡 선생은 이순신 장군보다 4살 연상이다)
조선개국 200주년을 맞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시 당신 조선 임금인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까지 피난했고, 이후 대명對明 외교와 군수물자보급, 후방안정화에 공을 세워 전쟁 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됐다. (이 공신목록이 문제가 참 많은데 대표적인 예로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며 조선수군을 셀프궤멸시킨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이순신, 권율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류성룡 선생이 책록된 호성공신의 절반 이상을 단순히 선조를 호위한 내시, 호위관 같이 군공이나 전공이 없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1598년 정적인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류성룡 선생은 남인) 관직을 떠난 뒤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저술 등에 힘쓰다 1607년 향년 66세로 타계한다. 선생이 타계했을 때 시장의 상인들이 스스로 철시를 할 정도로 백성들이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류재란의 양란 시기에 조정대신으로서 전쟁을 지휘하고 비상시국의 국가를 운영했던 류성룡 선생이 남긴 반성과 경계의 기록이다. '징비'라는 의미불명의 단어도 바로 반성과 경계라는 의미이다. 여기까지 보면 훈계조의 지루한 책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헌데 <징비록>을 읽어보면 굉장히 사실감 있는 묘사가 많다. 종군기자가 쓴 르뽀기사를 읽는 듯하다. 선생이 실제로 여러 전장과 후방을 바삐 움직이며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한 경험이 녹아있어서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고전은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만 극복할 수 있다면 밀덕이 아니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전쟁과 참화의 기록이다.
전쟁의 발발로 흉흉해진 민심 이야기를 한 데서부터 시작해보자.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고, 신립이 충주에서 무너지자 도성을 버리고 몽진(이라 쓰고 도망이라 읽는다)을 추진하던 조정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은 장예원(노비문서가 보관된 곳)을 시작으로 경복궁, 창덕궁 등 한양 궁궐은 모두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의해 불탔다고 전하고 있다. 백성들 몰래 도성을 빠져나와 개성을 향해 가는데 한 농부가 말한다.
마산역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일행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했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78p.
지방수령이 마련한 어식을 호위군관들이 달려들어서 다 먹어치운 바람에 임금이 좁쌀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고초(?)를 겪은 끝에 어가가 개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양이 함락된 후였다. 다시 평양으로 부랴부랴 도망을 쳤는데 여기서도 불안하다 하여 의주까지 가게 된다. 여차하면 요동을 통해 입조(라고 쓰고 나만탈출이라고 쓴다)하느냐, 왜군하고 먼 함경도로 가느냐로 다투던 조정의 소식이 들리자 열받은 평양 백성들, 사대부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왕실의 신주단지를 길에 던져버리며 데모를 벌인다.
그러나 이미 적군이 대동강변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재신宰臣(주-재상급의 높은 신하) 노직 등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궁인들을 호위하며 성을 나섰다. 이 모습을 본 (평양)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칼을 빼 길을 막고 나서며 폭행했다. 신주는 길에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들이 재신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속이는구나!"
-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99p.
도망가기 바쁜 조정에게 백성의 신음소리가 닿았을지 모르겠지만 생존이 걸린 백성들에게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도륙되고 약탈당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신주단지 들고 도망갈줄만 알았던 봉건시대 지배층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의주까지 도망가서야 중국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읍소한다. 그 사이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왜군은 평양성을 점령했다. 심지어 함경도 일대를 휩쓴 가토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공격해 그들의 성을 빼앗기도 한다. 전라와 충청 일부를 제외한 전국토를 왜군이 유린하고 다녔지만 조선의 관군은 저항다운 싸움 한 번 벌이지 못했다.
- 예나 지금이나 남의 집 셋방살이와 빌린 남의 돈 빚독촉은 동짓날 추위보다 시리다
다행히 왜군의 중국 본토 공격을 막으려는 명나라의 군대가 출병하여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남해안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이 잇달아 왜군을 격파하면서 왜군에 쏠려있던 전세가 균형추를 맞추게 된다. 그런데 남의 군대 모셔와서 우리 싸움 시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공짜는 없는 법. 명군의 식사와 물자, 잠자리를 제공하느라 조선 조정을 곤역을 치른다. 실무자였던 류성룡 선생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의 군대 진군을 재촉하고, 왜적과 강화하려는 명나라의 외교적 시도를 온몸으로 막다가 정승의 몸으로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평양성이 수복되자 대동강 이남의 적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적을 뒤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제독(주-당시 명군 제독 이여송을 말한다)이 내게 말했다.
"우리가 진격하고자 하는데 말먹이와 군량이 부족하다는 말이 들립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시는 공께서 나서 군량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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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군사가 개성에 머문 지 여러 날이 지나자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급되는 양은 강화도에서 들어오는 조와 말먹이가 조금 있었고,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배로 들어오는 세곡이 전부였다. 도착하자마자 모두 소진될 정도였다.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바닥났다는 핑계로 제독에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였다. 뜰 아래 우리를 꿇어앉히고는 큰소리로 문책했다. 나는 우선 사죄하면서 제독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163~16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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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 원수(주-당시 도원수 김명원을 말한다)와 함께 아침 일찍 개성으로 제독을 찾아갔다. 그러나 우리를 만나 주지 않았다. 김 원수는 할 수 없이 물러가려 했다. 나는 좀 더 기다리자며 말했다.
"제독(주-당시 명군 제독 이여송을 말한다)이 우리를 시험할 수도 잇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러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빗속에 기다리고 있자니 제독이 보낸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며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전갈이 전해졌다. 나는 들어가 제독에게 예의를 표하고 사과했다.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175p.
이런 굴욕에 이런 망신이 또 있었을까 싶다. (뭐 반백년도 안되서 이번에는 여진의 후금에게 더한 굴욕을 당하...) 일국의 대신이 남의 나라 장군에게 노골적으로 군수보급을 재촉당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끌려가서 혼나는데다, 내 나라 위해서 옳은 말 하고도 미움 사서 사죄하러 갔다가 비맞고 밖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김상중 씨, 앞으로 연기하시려면 굴욕신 많으시겠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국무총리나 장관이 주한미군 사령관 앞에 끌려가서 책임추궁 당하고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으니 지금으로 봐도 말이 안되는 일이다. 허나 당장 망하게 생긴 약소국의 신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읍소하고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급이 잘 되지 않던 조선에서 명군 역시 왜군 못지 않은 약탈과 징발을 자행했으나 힘없는 조선조정은 뭐라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중국 황제의 사신으로 들어와 있던 사헌이란 사람이 선생에게 "내가 들으니 조선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고 말한다는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을까.
- 여기가 생지옥이올시다!
나라꼴이 이 모양이었으니 민초들의 삶이야 말할 것도 없이 비참했을 것이다. <서애집>에서 류성룡 선생이 묘사한 당시 상황을 한 번 들어보자.
신의 군관 부장部長 곽호郭護가 강화에서 구해 이끌고 온 남녀 노약자만도 900여 명이요, 이빈의 군관 우림위 성남이 여기저기서 구한 자가 200여 명입니다. 그 밖에 여러 진중에서 나온 자가 끝이 없으나 기운이 다해 길가에서 죽는 백성이 허다합니다. 마산역 근처에서는 이미 죽은 어미 곁에서 울고 있는 젖먹이도 있었습니다.(주-이 아이가 울며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가 이를 슬프겨 여겨 군정軍丁을 시켜 말에 태워 안고 와서 기르고 있으니, 비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275p.
<징비록>에서는 빈민구제를 위해 애쓰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들을 다 구제하지 못하는 가슴아픈 장면도 실려있다.
그 무렵 계속 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 까닭에 양곡을 싣고 남쪽에서 올라온 배들은 많았지만 한 톨의 곡식도 전용할 수는 없었다. 때마침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민학安敏學이 겉곡식 1000석을 배에 싣고 당도했다. 즉시 임금께 장계를 올려 이를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 먹이기로 했다. 우선 전 군수 남궁제를 감진관監賑官에 임명한 후 솔잎을 따다 가루를 낸 후 솔잎 가루 열 푼에 쌀가루 한 홉을 섞에 물에 타서 마시게 했다. 그러나 곡식은 적고 사람은 많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본 명나라 장수들이 자신들의 군량 30석을 내놓아 백성들에게 나눠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언젠가 큰 비가 내린 날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밤중에 내 숙소 곁에서 모여 신음 소리를 내는데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주위를 살펴보자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171~172pp.
이런 꼴이었으니 그 참상을 실제로 봤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니 어찌 그 참상을 글로 다 옮길 수 있었겠는가. 정상적인 국가와 정상적인 국가관리였다면 이 상황을 보고 어떤 대책을 내놓았을까. 일단 왕과 조정이 임시수도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의병을 격려하며 군공을 세운 자에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면천과 벼슬 등을 포상하여 군민이 힘을 모아 전란을 조기종식 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유능한 지방관을 각 지역의 요충지로 파견해 고향과 농토를 떠나 유랑하는 백성을 모아 구휼하고 능력있는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해야했을 것이다. 둔전과 교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면 아니됐을 것이다.
- 참으로 경악할 일입니다!
그런데 <징비록> 어디를 봐도 그런 정책이 시행됐다는 이야기는 없다. 적극적으로 백성을 구휼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는 서술 역시 찾기 힘들다. 외려 환란 중에도 백성을 쥐어짜는 각종 세금의 병폐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혹해졌다. 특히 공납의 폐단이 심각한 수준이었는다. 영화 <광해>에서 논의되던 '대동법'을 이미 이 시기에 류성룡 선생이 '작미법'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했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안타까운 것은 선생이 조정에서 국가를 재건할 주장을 펼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들만 취했을 뿐 국가의 주요정책이 되어 시행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서애집> 1596년의 기록에는 임란의 전란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 쥐어짜서 잔치를 벌이는 어이없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상소의 기록이 있어서 후대를 어이없게 한다.
최근 황해 감사 류영순柳永詢을 직접 찾아갔는데, 그는 스스로 절약하고 공무를 받들어야 하는 수령의 표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그의 친족 가운데 등과登科한 자가 있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에 소요되는 물건을 여러 고을에 분담시켜 백성들에게 많은 폐를 끼쳤다고 합니다. 오늘과 같은 어지러운 때에 털끝만큼도 백성을 괴롭히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사적인 일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다니 참으로 경악할 일입니다.
-류성룡 저, 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14, 305p.
선조의 몽진을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떠오르는 것처럼, 황해감사 류영순 횡령과 배임의 경우를 보면 국민방위군 사건이 떠오른다. 이런 나쁜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큰 불행일 것이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반드시 부패했을 뿐더러 무능한 인물들이 권력과 그 주변에 기생하며 국가의 대사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국무총리로 재직 중이신 분의 재산 축적과정을 살펴보면 황해감사 류영순의 경우는 귀여운 편에 속할 지경이지 않은가. 국가의 이익이나 국민 다수의 공익보다는 내 스스로의 이익과 내 주변사람과 같은 편의 사익이라는 작은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들로서는 일련의 판단과 행동들이 그들 사고의 논리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류성룡 선생의 말마따나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징비록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편을 통해 <징비록> 원작을 살펴보았다. 사실적인 묘사가 50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하게 전달되니 마음이 아프다. 왕은 도망가고, 힘내서 싸워야 할 장정들과 장수, 관리들은 도망하기에 급급하고, 남겨진 노약자와 아녀자, 아이는 살해당하고 약탈당하고 납치당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읽어가는 동안 독자는 이것이 단순히 전쟁 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해서 벌어진 참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여객선이 조타에 실패해 거친 조류에서 균형을 잃고 쓰러져서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그 이면에는 국가와 기업의 검은 유착관계와 관련자들의 안이한 태도 등 수없이 많은 사회적 원인이 있었던 것처럼, 임진왜란 역시 그 발발 전부터 외교, 조세, 정치, 군사 등 사회의 다양한 부문에서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평소에 작은 부정과 불합리, 비리 등이 누적되고 고착화 돼서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사회는 투명하지 못한 사회다. 불투명한 사회구조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인물보다는 아부를 즐기고 남을 모략하기 좋아하는 협잡꾼들이 출세하기 쉽다. 따라서 지배층을 이루는 사람들의 수준이란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의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이런 사회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작은 충격으로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쉽다. 시스템의 하부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의 충격에 유연하게 대응할 지배층의 전략과 능력이 부재하며 공공을 지킬 의사와 의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500년 전 조선 역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은 물론 양인들도 군역을 기피했고, 각종 세금은 과중했다. 외교적으로는 명이 쇠퇴하고 만주에서는 여진의 후금이 서서히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정세와 동북아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장수 하나 임명하는데도 조정에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류성룡 선생은 이를 반성하고 후손들로 하여금 경계하고자 <징비록>을 남기셨으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우리는 그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사회지도층이 앞서서 군입대를 기피하고, 각종 세금은 나날이 오르기만 하는데 정치는 국민의 살림살이를 보조할 사회보험과 교육, 의료 등의 사회복지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AIIB 참여 요청과 미국의 THAAD 도입 등 동북아 외교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그 어떤 외교적인 수완 하나 발휘하지 못하고 강대국 틈에서 동네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 정도만 봐도 우리가 <징비록>의 교훈 어느 하나 제대로 배웠다 말하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배울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걱정스럽다.
*추후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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