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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당신이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역사적 이유



TV를 즐겨보지 않지만 최근에 어느 사극드라마에서 정몽주(임호 분)가 선죽교에서 암살당한 장면으로 꽤나 화제가 됐나보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포은 정몽주는 고려 말의 대학자이기도 하지만 일반에는 목숨으로 사직을 지키려한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알려져있다. 많은 시청자들이 정몽주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그 수하 조영규 일당에 불의함을 느꼈던 것은 충절에 대한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삼남지방이 왜구倭寇에 약탈당하고(실제 태조 이성계도 왜구토벌에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고 이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벌로 성장해 역성혁명에 성공한다) 홍건적에 위협당하던 백성들을 나몰라라 방치하던 무능한 왕조권력의 역사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반역의 무리에 대한 분노가 먼저 앞섰다면 말이다.


제국주의적 세력확장을 추구하던 열강이 한반도에 손을 뻗쳐올 때도 전제권력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수탈에 지쳐 스러져가던 백성들이 스스로를 지키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청淸과 일본에 원병을 청원했다가 결국 두 나라에 이 땅마저 전쟁터로 내주고 말았다. 수많은 백성이 집을 잃고 목숨을 잃었지만 무능한 왕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기울어져가는 왕조의 권위를 유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봉건시대 통치자들의 암묵적 계율조차 잊은 왕조는 그렇게 몰락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종묘사직에 충절을 바치는 것을 사대부의 사명이라 자부했던 조선 양반 중에 목숨으로 저항한 이조차 몇 되지 않던 허무한 최후였다. 나라의 운명에 참여할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한 백성들은 눈뜨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던 식민통치의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지능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경찰과 헌병을 통한 무단통치가 조선 백성들의 저항을 유발하고 결국 3.1만세운동으로 폭발하자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노선을 변경한다. 그 일환으로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이에 따라 일본인이 많이 모여사는 전국 12개 부府와 24개 면面에서 조선 최초의 근대식 선거가 시행된다. 일제의 조선인 회유책에 따라 시행된 이 선거에서 선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1. 남자 2. 25세 이상 3. 연간 5원(현재 시가로 50만원 상당)이상 납세자라는 조건을 갖춘 자라야 했다. 그래봐야 이에 해당하는 조선인은 부府에서 1000명당 12명, 면面에서 1000명당 8명에 불과했다. 당시 선거권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권력이면서 동시에 일제로부터의 혜택과 특권을 보장받았음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의 선거권은 헌법으로 보장되는 권리로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국민의 투표로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여기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됐다. 국민들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표자들이 지배하는 공화정의 첫 걸음 뗀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각종 부정선거로 몸살을 앓다가 급기야 초대 대통령이 하야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니, 혼란을 틈탄 군사쿠데타 일당이 국민이 선출한 합법적 정부가 전복시키기도 했고, 친위쿠데타인 유신維新으로 국민의 선거권이 박탈당하기도 했다.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 국민이 유신이 선포된 72년부터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할 때까지 공화국의 대표인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조차 제한 받은 것이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법이 허락하지 않는 저항 외의 수단이 없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이 나라의 역사에서, 성별과 재산의 유무, 학력,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하나의 특권이자 권력이기도 했던 선거권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그 동안의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항상 최선의 결과만을 도출해 낸 것은 아니나 조금씩 민주주의를 체화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냉소가 대두하고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에 따른 선거무용론이 판을 친다. 내일 진행될 지방선거에서도 일개 구의원, 시의원 뽑아서 내 생활이 얼마나 변할 것인가에 회의를 품은 시민들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쭉 이야기 했던 것처럼, 당신이 포기하려는 그 권리는 무척 소중했던 권리이며 어렵게 얻어진 결과란 것, 그리고 나쁜 정치와 부패한 정치인은 바로 당신의 그 냉소와 무관심을 먹고 산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