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다니다 보면 학교 점퍼를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전에도 그런 학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빈도나 숫자가 확연히 늘었음은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제 학교 이름을 자랑스럽게 등에 새기고 돌아다니는 그들의 표정에서 마치 '나는 S표 인간이다'는 듯한 오만함이 풍겼다. 내 가까이 봐도 그런 학생이 한 명 있다.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재학중이던 친군데 Y가 새겨진 점퍼를 주구장창 입고 다니는 건 물론,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큰 친구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방의 모 전문대에서 편입한 학생으로 그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뒤에서 수군거리는 분위기였다. 학력세탁을 했다며. 과거의 학벌學閥이 동문간의 이권독점 등으로 세워진 카르텔이었다면 지금 20대들의 학벌은 계급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미세하게 구분된 카스트처럼 학교와 학과로 서열을 세우고 그 안에서 자랑스러워하기도,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정기적인 서점 나들이에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충동적으로 집어들게 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책의 부제처럼 '괴물이 된 20대'를 나는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대학 점퍼의 유행 이면에 숨어있는 사회학적 의미를 알고 싶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목차를 훑어보니 이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고민하지 않고 골라서 가져온 바로 몇 시간 안에 다 읽었다.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이란 부제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오찬호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시간강사이기에 앞서 기성세대의 눈으로 현재의 20대를 가장 많이 바라보고 접해본 사람이다. 오찬호의 분석이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직접 인터뷰하고 대화를 나눈 20대 대학생들의 이야기는 분명 현실이다. 또한 20대가 보여주는 모순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정확한 근거이기도 하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20대는 괴물이 아니라 이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이 강요하는 법칙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20대의 이미지는 괴물이 아니라 겁에 잔뜩 질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불안이란 유령과 싸우고 있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에서 많은 20대를 만났다. 그가 20대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은 그의 제자들인 '독수리5형제'의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거리에 나서 당당히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독수리 5형제가 '미네르바 사건'과 '용산참사'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성세대인 저자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그 시작이다.
(미네르바에 대해 독수리 중 한 명이) "솔직히 전문대 출신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가 말한 것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상 증명된 것 아닌가요? 표현의 자유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죠. 하지만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할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당했다면 왜 처음부터 본인의 학력을 밝히지 못했나요?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이 '당당해지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미네르바가 전문대 출신이므로 '비전문가'라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 '표현의 자유'와 '전문대 출신'은 같은 층위에서 논의될 사안이 전혀 아니다. 아니, 전문대 출신이라면 표현의 자유가 제약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것이 이들의 분명한 논리였다는 점이다.
...
용산참사를 보는 이십대의 눈에서도 같은 논리가 발견된다. ...... 독수리5형제들도 분명 철거민들이 불 타 죽은 일에 대해서는 함께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늘 최종적인 결론은 "그래도 철거민들의 요구가 과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는 역시나 본인들의 '현실'이었다. "무작정 떼쓴다고 될 일인가? 내가 얼마나 지금 노력하고 있는데...."가 그날 술자리에서 족히 백여 번은 언급되었으니.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66~67pp.
좁디 좁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노력들, 예컨대 (일부러) 연애를 하지않고, 잠을 줄이며 모든 활동의 포커스가 학점이나 공모전, 취업관련 활동들에 맞춰져 있는 삶을 20대 스스로도 힘겨워한다.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남을 그 기준으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허접한 대학에 진학했거나 대기업이 아닌 직장에 취직한 것은 그들의 기준으로 당연히 차별받아야 되는 것이고 그 반대는 우월한 입장에서 차별을 해도 되는 위치인 것이다.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도 않은 대학생들이 이미 학교 점퍼를 통해 사회에 보여준 것은 이런 차별의식의 가시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대학생들의 태도를 잉태한 원인으로 자기계발서의 득세에서 찾는다.
지금의 이십대들은 과거의 이십대들이 삼십대가 넘어가면서야 천천히 형성하던 생각들을 어차피 사회에 진출할 것인 이상 빨리 알아두면 좋은 가르침 정도로 자주 접하게 된다. 사회적 선행학습이랄까. 자기계발서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기계발서의 상당수가 '성공한 직장인'들의 입을 통해 미리 알아두면 좋을 '사회상식', 달리 말하면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사회는 무지막지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120p.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여기였다. 20대가 보여주는 다양한 차별의 모습과 양태들에 대한 관찰과 분석은 현실적이었고 재미있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하는데 있어 자기계발서 탓만 하기에는 너무 단조롭지 않았는가 하는 점 말이다. 깊이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물론 뒤쪽에 이십대들이 성장기에 IMF사태를 보고 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란 점, 대학이 기업에 점령되면서 경영학의 논리가 이들의 머리를 잠식했다는 점, 적은 성공사례를 들어 신데렐라의 꿈을 꾸게 하는 사회분위기 등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너무 서둘러 결론을 내려한 듯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면에 이 책은 이십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데 매우 탁월하다. 날것 그대로의 이십대들의 이야기. 어느 책에서도 이 정도의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분석에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데 가치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불균형에서 오는 미덕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쯤 되면 '그래서 어쩌잔 말이냐?'고 성급하게 질문을 들이대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현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큰 사람일수록 더욱 날카롭고 큰 소리로 덤벼들 가능성이 높다. (원래 개가 크게 짖는 것은 상대를 위협하기보다는 제가 불안해서 그런 것이라 하지 않는가) 바로 대안부터 요구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문제에 대한 이해보다는 현상을 단번에 뒤집을 방법부터 요구하는 성급한 사람들이다. 마치 진단도 끝내지 않은 의사에게 약과 처방부터 요구하는 셈이랄까? 지금이 힘들고 괴롭다면 그 원인을 이해하고 개선할 방법을 궁리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자기계발의 담론을 철저히 검증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십대들이 진리처럼 믿고 따르는 자기계발논리의 허점을 명백히 한다면 그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결국 개인에게도 손해가 되고 말 것임은 자연스럽게 증명될테니. 대안에 대한 논의는 그 공감대의 형성에서 가능하다.
사실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논할 때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 것은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자면 가급적 기존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훨씬 이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개인에겐 큰 손해다. 자연히 자기계발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된다.
"연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식의 어설픈 대안을 내세워 "그건 추상적인 소리야!"라고 평가절하당하기보다는, 왜 우리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공감하는 게 오히려 자기계발 권하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194~195pp.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선언>의 서문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바뀌었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실직-비정규직, 질병-의료, 육아-교육 등등에 관한) 불안이라는 유령이." 한국사회의 모든 부문과 각세대를 망라한 모든 개인에게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이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멀이지기 위해 각 개인들은 사투를 벌인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아직 물 위에 떠 있는 부분으로 도망쳐서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하지만 불안으로 침몰하는 배에서는 결국 아무도 생존하지 못한다. 이와 똑같이 불안으로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편을 갈라서 내 것만 챙기려는 사회에서는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다. 기껏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어야만 하면 '그게 사는 건가'.
사회에서 벌어지던 진흙탕 싸움의 논리는 이십대들의 가정에서 (조금은 세련되게) 자녀들에게 궁극의 생존비법으로서 가정교육이란 이름하에 전수됐다. 학교에서는 등수와 서열을 정하는 실전모의고사를 통해 이십대의 성장과정에서 그들의 내면에 각인됐다. 그런데 (부모의 학력수준과 재산 같은 것들이 포함된) 각기 다른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성을 묵살한채 성적으로만 평가하는 이 시스템을 누가 누구에게 강요했는가. 제 아무리 자신이 희망하는 전공이 있어도 전공때문에 자신의 수능점수 아래에 있는 학교를 가는 것은 (절대 하지말아야 할) 어리석은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때, 이십대가 느낀 사회와 현실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 것인가. 이 책의 부제처럼 이십대가 괴물이라면 누가 그 괴물들을 양산했고 그들끼리의 싸움을 부추겼는가. 내가 보기에 이십대는 생존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과 학교에서 배운대로 성실히 한 것밖에 없다. 그것이 죄라면 죄겠지만.
그런 이십대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안녕들 하십니까?"고 되물었을 때, 기성세대가 보여준 반응은 솔직히 대자보의 주인공인 주현우 씨의 말처럼 '웃겼다'. 마치 (누구는 돌 한 번 안 던져봤냐던)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듯한 아전인수는 이미 기성세대로 넘어와버린 내가 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후안무치였다. 대학생들을 취업전쟁이라는 배틀로열Battle Royal로 몰아넣고서는 이제와 문제제기를 하는 이십대에게 '기특하다'는 반응과 거기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이라니... 이미 서로 할퀴고 할큄을 당한 상처를 안고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량진 고시촌에 몰린 젊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다. "요새 것들 쯧쯧"거리는 책임추궁도 아니다. 이십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부조리한 세상에 갓 진출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힘겨워하는 그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다. 그렇기에 당신들의 손에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를 권한다. 바로 이십대에게 차별하라 명령한 당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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