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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경제ㆍ경영

[사회문제의 경제학 Social Problems - 헨리 조지 著, 전강수 譯] 헨리 조지와 한국의 사회문제



사회문제의 경제학

저자
헨리 조지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3-09-0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저작이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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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었던가. 장편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한 작품에서 이런 대사를 봤던 기억이난다. "살아서는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가지지 못했던 그가 죽었다고해서 제 몸 하나 누워 묻힐 땅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농업이 사회의 주력산업이었던 시대, 토지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의 원천이었다. 땅을 많이 소유했다는 말은 곧 많은 부를 소유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시대는 변했고 농업은 더이상 사회의 중심산업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송곳 하나 꽂을 땅' 한뼘도 소유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이 대다수다. 20여년 전 돌아가신 내 생모께서도 살아생전에 땅 한 평 없이 사시다 임종하셨고, 돌아가셔서는 시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역에 '분양'을 받아 '자리세'를 내고 안장되셨다. 그마저도 몇년 전 계약기간이 끝났다하여 파묘 후 화장하여 새로 모셨다. 결국 돌아가셔서도 당신 몸 하나 편히 누울 땅이 없었던게다. 이런 삶을 살다가는 사람이 비단 내 어머니 한 분이실까.


헨리 조지는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 안다 하더라도 이름 정도 들어본 게 전부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와 토지공공개념 대한 아이디어가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랬던 헨리 조지와 그의 사상이 2013년이 저물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1970년대 시작된 강남개발에서 시작한 부동산, 특히 토지에 대한 투기가 붐을 이뤘던 한국사회. 그리고 그 투기로 인해 막대한 부를 얻었거나 이를 옆에서 지켜봤던 한국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부동산불패'의 신화 속에 갇혀 살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기회주의와 한탕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 시민들은 차츰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도 지나치게 거품이 낀 토지와 아파트는 언제 폭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씻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폭락의 미래가 멀지 않은 오늘, 한국인들이 헨리 조지에 주목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헨리 조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꾸준한 독서와 훈련을 통해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았고, 링컨 대통령의 암살사건이 벌어졌을 때 썼던 칼럼이 주목받으며 일약 신문사 식자공에서 기자로 발탁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진보와 빈곤>, <사회문제의 경제학>, <노동 빈곤과 토지 정의> 등의 저서를 발간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강연과 저술에 힘썼다.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다시 도전한 선거에서 투표를 며칠 앞두고 숨을 거둔 헨리 조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단순히 자기 지식을 자랑하려는 먹물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가졌고 사람들을 사랑했던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사회문제의 경제학>의 역자 전강수 교수가 북토크 강연중이다


책을 읽던 중에 돌베개출판사에서 마련한 북토크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헨리 조지의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와 <진보와 빈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경북대 김윤상 교수를 모신 자리였다. 프라자호텔 뒤편에 위치한 한 카페공간(Space Noah, 중구 북창동 11-6 4층)



에서 진행된 북토크는 그 자체로도 유익했지만 헨리 조지를 읽었거나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더욱 유익했던 자리였다. 김윤상 교수와 전강수 교수는 국내에서 헨리 조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지스트이며 헨리 조지의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와 노력에 매진한 인물들이다. 이 지면을 빌어 번역과 강연을 위한 노고에 감사를 전하며 자리를 마련한 돌베개 관계자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두 분과 안면이 있거나 특별한 관계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헨리 조지라는 낯선 이름은 '어렵다'는 편견을 갖게 만든다. <진보와 빈곤>을 읽어봤다면 편견이 사실이었다고 무릎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문제의 경제학>은 다르다. 속칭 '술~술~ 읽힌다'. 우리가 경제학이라면 떠올리는 수식이나 그래프도 없다. 부담없이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여담이지만, 북토크 중 질의응답 시간에 "경제학의 패러다임이 수식이나 그래프 같은 수리 쪽으로 기울어져 일반시민들의 거부감과 공포심이 큰데, 이를 극복하고 헨리 조지가 주장했던 경제학의 저변을 넓힐 전략은 무엇이 있는가?"는 내 질문에 "지금 미국유학파 경제학자들은 수식 쓰고 그래프 그리고 미적분 조금 한 다음에 '너흰 이거 모르지?' 이러면서 사람들 따돌리고 자기네들끼리 좋아한다"는 촌평을 하기도 했다)


총 300여 페이지에 걸쳐 22장으로 구성된 <사회문제의 경제학>은 양보다는 질로 승부한다. 그리 길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부는 어디에서 오고, 인간이 누려야 할 자연권은 왜 보장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데 따른 현실의 이유와 그에 대한 분석, 거기에 따른 사회개혁의 당위성과 그 방향제시까지 마쳐내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말년에 헨리 조지를 알게 된 이후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은 바로 이런 그의 논리적 태도와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역자인 전강수 교수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보와 빈곤>에 더하여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케팅일지도 모른...)


읽는 중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바로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묘사해 내는 헨리 조지 당시의 미국사회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생산비를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고, 여성들이 어머니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단지 기계에 원료나 공급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존 투쟁의 잔인함은 줄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 대다수가 시간과 능력을 다 바칠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만, 삶의 걱정거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 정신이상과 자살이 증가하고 있고 결혼을 꺼리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한쪽에서는 거대한 재산을, 다른 한쪽에서는 떠돌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 헨리 조지 著, 전강수 譯, <사회문제의 경제학>, 돌베개, 2013, 186p.


아이들은 단지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장을 방해받을 정도로 조기교육에 시달리고(심하면 틱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워킹맘들은 법이 정한 출산휴가에서부터 육아휴직 쓰는데도 눈치를 보고 눈물로 읍소해야 하는 형편이고, 청년들은 바늘구멍 취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늘도 저 살벌한 시험경쟁으로 내몰렸고, 직장인들은 야근은 물론 주말도 반납한채 OECD 최고를 기록한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며, 우울증 환자수와 자살률이 그 어떤 나라보다 많고, 결혼적령기 남녀의 결혼비율은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 나라 대한민국. 마치 이를 관찰하기라도 한듯 묘사한 헨리 조지의 지적은 왜 <사회문제의 경제학>이 고전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미국에서 140년 전에 벌어진 이 상황이 현재의 한국사회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의심하고 삶의 비애를 느낀다.


헨리 조지는 토지의 사유화가 아무 근거도 없고, 그것은 결국 쏠림현상으로 이어져 일하지 않고도 막대한 부를 소유하는 몇이 출현하는가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떠돌이가 되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류가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각종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개발능력이 과거와 비교도 안되게 커진만큼, 늘어난 규모에 맞게 인류의 사회제도와 의식수준도 고도로 발달돼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의 원칙의 가장 처음에는 '정의正義'가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헨리 조지의 주장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사회제도는 정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란 너무도 명확해서 누구도 부정하거나 논박할 수 없는 권리에 관한 원칙들-자연스럽고도 영원한 원칙들을 의미한다. 이 원칙들은 너무도 명확해서 사회적 불의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조차 지성의 벖칙을 따르다 보면 염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생산하는 사람이 소유해야 하고 저축하는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부자들에게서 그들이 차지해야 할 정당한 몫의 일부라도 걷는 것에 반대한다.


- 헨리 조지 著, 전강수 譯, <사회문제의 경제학>, 돌베개, 2013, 121~122pp.


정의를 찾아보기는커녕, 덜 더러운 것을 찾아 정의롭다 해줘야 할만큼 혼탁한 사회에서 정의를 독점하기 위한 좌와 우의 갈등은 사실 아주 유치한 수준으로 진행중이다. 당장 내일의 생계가 급한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있는데 오늘도 전혀 무익한 정의를 찾아 싸우는 작태들은,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말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봤을 때 한심하기 그지 없는 모습들이다. 기회다 싶으면 뽑아 드는 종북이나 좌빨 같은 도깨비 방망이 좀 걷어치우고 나면 헨리 조지의 원인분석과 해법은 현실적으로도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제안들이다. (헨리 조지도 당시에 좌빨로 몰렸기는 하다만...) 종북이냐 종박이냐보다 실제로는 엄청난 조세저항과 기득권 유지움직임이 제일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안 듣고는 우리의 몫이지만, 이미 그가 지적한 사회적 과오를 또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어제 나와 같이 짧은 외근을 함께 했던 분은 5살짜리 아이를 둔 엄마였다. 수천 세대는 돼 보이는 아파트촌을 지나면서 '저 많은 아파트 중에 왜 우리집은 없는 거냐'는 내 능청에 둘이 같이 웃었다. 최근 몇 년 전에 집근처가 뉴타운으로 지정돼 내집마련의 꿈이 저멀리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나오는 웃음이 어찌 순수한 웃음이었겠느냐만 어디 그곳만 그러하겠는가.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한 사람의 청춘을 오롯이 바쳐야 한다면, 그리고 그런 세대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면 이것은 진보하거나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돼야 부동산지옥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참고하기 바란다. 우리보다 앞서 토지와 부동산문제의 폐해를 겪은 뒤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은 경제학자가 있다. 그가 <사회문제의 경제학>에서 당신에게 특강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