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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著, 노정태 譯] 재앙을 초래한 나라 슬픔에 빠진 나라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저자
다니엘 튜더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3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불가능의 기적을 이룬 나라 아직도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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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첫발을 내딛은 시절, 오로지 서울에서만 살아왔던 20살짜리 풋내기들은 지방을 거론해야 할 때면 거의 예외없이 '시골'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던 기억이난다. 서울에서조차 자신이 살고 있는 구區와 가봤던 몇몇 번화가 외에 경험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지방이란 곳은 아주 생소하고 낯선 곳이었을게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표현하는 말로는 겨우 '시골'밖에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경험과 시야가 부족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서울 촌놈'들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이티를 떠올리면 그 끔찍했던 대지진의 재앙과 폐허가, 캄보디아를 떠올리면 잔혹했던 킬링필드 악몽을 먼저 떠올리듯 말이다. 한국 역시 외국인의 뇌리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도 많아졌고, (우리의 자뻑이기는 하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서울 촌놈'같은 외국인이 아니라면 이제는 한국인들이 이룬 성과를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두어해 쯤 전에 '한국맥주가 북한의 대동강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기사를 써서 논란을 일으켰던 다니엘 튜더. 그는 2002년 학생시절 한국을 방문한 이후 꾸준히 한국을 경험하고 바라본 외국인 중 한 명이다. 다니엘 튜더가 10여년간 경험하고 관찰한 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니엘 튜더가 다른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한다면 어떤 나라로 전해줄까.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과 같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상당히 꼼꼼한 자료조사와 관련 인물에 대한 인터뷰를 적절히 활용한 내용이 신뢰를 준다. 우리에겐 역사적/문화적으로 너무나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도 다니엘 튜더에게는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한국의 문화, 예컨대 외국인들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정情이라던지 한恨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목은 저자가 한국의 문화를 상당히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이 가지는 따스함을 느끼면서도 그로 인해 한국사회에 퍼진 집단주의나 정실情實주의를 지적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한국인들은 흔히 말하곤 하는데, 이는 정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해악에도 불구하고, 그 따스함과 관대함 덕분에 정은 여전히 한국 문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심지어 외국에서 온 방문자들도  한국인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의 힘을 느끼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풍경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실로 무척 슬픈 날이 될 것이다.


- 다니엘 튜더, 노정태 옮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2013, 문학동네


다니엘 튜더가 소개하는 한국의 모습에는 분명 자랑스러운,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우리의 경제적, 민주적 성과와 오랫동안 축적해온 역사, 문화적 유산이 매우 많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침몰 참사를 보면서 자랑으로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이 어느새 대재앙을 초래한 원인이 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참사 이후 까면 깔수록 드러나는 주무관청과 관련민간업체의 어두운 거래가 속속 보도되고 있다. '해피아'라는 신조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해양수산부나 해양경찰청 같은 해양안전관리부처와 선박의 안전을 검사하고 인증하는 한국선급, 승객의 수와 화물의 중량, 고정상태를 관리감독하는 한국해운조합 등이 맺은 관계는 철저히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이권결탁이었다. 권력과 자본의 은밀한 결탁은 한국적인 상황에서 전관예우, 선후배관계, 인간관계 등의 요인을 아교삼아 얽히고 섥혀서 더욱 밀착된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검찰이 계속 해당회사들을 압수수색하는 모양이지만 이미 벌어진 참사를 되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조치였다. 그렇기에 다니엘 튜더가 지적한 다음 대목은 참으로 아프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는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 손에 달려 있다. 떨쳐내지 못한 부패의 유혹에 아직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걸려든다. 부패의 관행만 아니었어도, 한국은 22위(EIU가 발표한 '2011 민주주의지수 Democracy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세계 22위)보다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2년 국제투명성기구의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Corruption Perceptions Index에서 한국은 고작 세계 45위에 머물렀다. 이는 이웃 나라 일본에 크게 뒤지고, 르완다보다 약간 앞서는 수준에 불과하다.


긴밀하게 형성된 엘리트 관계망과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정情은 한국의 부패 청산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인구 5천만인 이나라에서 취재를 하면서 깜짝깜짝 놀랐던 사실이 있다. 언론, 법조계, 정치계, 기업인, 학계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너무도 잘 알고 지낸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맥을 형성하는 데 학교, 군대, 대학, 고향 등 온갖 것들을 다 동원한다. 구성원을 결집시키는 정은 내부자의 이익을 위해 정실주의적 탈법행위와 부정행위를 감수하게 되는데, 그들 중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부패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 다니엘 튜더, 노정태 옮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2013, 문학동네


마치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뒤 드러나고 있는 각종 비리와 부패의 검은 커넥션들을 보고 쓴 것 같은 지적이다. 외국인 기자의 눈에도 이렇게 보였을진데 우리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형님 먼저, 동생 먼저 하면서 이권을 챙기고 챙겨주는데 바빴다. 그 사이에 재앙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줄기가 뻗으며 맹렬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마침내 재앙의 꽃이 만개했을 때, 독이 든 열매는 전혀 엉뚱한 어린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다니엘 튜더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영문명 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고 불렀던 한국은 지금 재앙을 초래한 나라, 슬픔에 빠진 나라가 됐다. 분명 한국은 놀라운 경제적 기적을 일으킨 나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 이제는 학생들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왜 우리가 오늘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냉정하게 분석하여 책임을 분명하게 가린 뒤 분골쇄신을 하지 않는 이상, 제2의 세월호 참사, 제3의 세월호 참사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가득 담긴 외국인 다니엘 튜더는 분명 그렇게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