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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지능 - 최재천] 다윈주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인간 그리고 지혜



다윈 지능

저자
최재천 지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2012-01-02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탄생이 창조주의 은총과 의지에 의해서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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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거칠고 험한 일을 하는 아저씨와 일을 끝내고 대포집에 마주 앉아 소주잔을 들었더랬다. 잔이 몇 순배 돌자 자연히 이야기는 아저씨의 과거로 쏠렸다. (나이든 아저씨들은 평소에 무뚝뚝하지만 약주가 몇 잔 들어가면 찜질방 아줌마들 못지 않게 말씀이 많아지신다) 여러 이야기를 하셨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아졌다.


"너는 이 생존경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오랜 세월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겪어낸 한 남자가 내게 남긴 충고는 그랬다. 냉혹한 생존의 법칙만이 게임의 룰로 남은 한국에서 아저씨의 말은 상당히 타당해 보였다. 마지막에 눈물을 보였던 아저씨를 보며 생존게임에서 낙오한 한 남자의 무력감과 회한을 잠시나마 공감해 봤던 경험이었다.


각 개인과 기업, 사회, 더 크게는 국가의 수준에서까지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적자생존의 논리라는 매우 단순하고도 편리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즐겨보는 아저씨들의 결론은 항상 그렇지 않은가.


"저 봐. 사자가 사슴을 사냥해서 잡아먹잖아.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야."


쉽게 인용할 수 있는 동물들의 사례가 많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이 논리를 듣게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찰스 다윈을 떠올린다. 그의 진화론과 연관지어 우등한 동물이 열등한 동물을 지배한다는 식의 착각을 한다. 과연 다윈은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일까.



인문계쪽 공부를 많이 했고 과학분야에 대해 무지한 내가 최재천 교수의 <다윈 지능>을 집어들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윈은 과연 적자생존의 논리만 주장한 학자였는지 궁금했다. 우연히 EBS에서 기획 특강을 하던 최재천 교수의 강의를 한 시간 보게 되고 나서 바로 책을 구입했다. 한국에서 최재천 교수만큼 다윈주의자로서 다윈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의 강의가 상당히 재밌었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도 컸다.


우선 다윈과 관련해 적자생존의 논리에 관한 오해부터 풀어보자. 최재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금 길지만 오해가 없기 위해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 같은 진보의 개념을 인간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것이 바로 사회 진화론 social Darwinism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 철학이나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우생학은 사실 언명만으로 당위 언명을 이끌어 내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의 언저리를 위험하게 넘어들었다. 다윈 자신은 그의 이론을 인간사에 적용시키는 일보다 진화의 메커니즘 자체에 훨씬 더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던 그의 '전도사들'의 성급한 진보주의로 인해 뜻하지 않게 이데올로기와 가치 논쟁에 휘말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다윈의 자연 선택 메커니즘을 설명할 때 흔히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ness'이란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다윈 자신의 표현이 아니다. 스스로 '다윈의 불독'을 자처하며 다윈의 이론을 알리고 변호하던 스펜서가 1864년 만들어 널리 퍼뜨린 이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최적자의 생존'이라고 해야 한다. 나는 이 표현이 알게 모르게 '최고', '일등', '유일' 등을 앞세우며 과열 경쟁을 부추긴 죄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 최재천, <다윈 지능>, 사이언스북스, 2012, 68~70p.


다윈에 관한한 국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자의 평가가 이렇다. 실상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말 자체를 쓴 일이 없으며 그의 추종자였던 스펜서에 의해 인간사를 설명하는데 이용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헌데 우리는 유명한 다윈의 이름을 도용해서 일등, 일류가 매우 과학적 논리의 결론인양 떠들어대고 있다. 각 개인은 강요된 무한경쟁의 쳇바퀴 속을 돌며 열등하고 무능한 자신을 학대하고 오늘을 살고 있다. 과학적 입장에서 인간과 생명의 발전과 진화에 대해 관찰하고 탐구했던 다윈이 지하에서 오늘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어떤 심정일지 자못 궁금하다.


다윈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윈을 제대로 알고 싶어 폈던 <다윈 지능>은 최재천 교수의 강의처럼 오히려 재미있어서 더욱 붙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의 진화과학은 우리의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사례로 드는 이야기들도 무척 재밌었다. 그 중 남성들의 착각을 깨줄 단락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성들의 대부분은 마치 일부일처제의 굴레가 벗겨지고 나면 일부다처제의 수혜자가 될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훤칠하고 잘생긴 송승헌이나 조인성 같은 친구들이 수백 명의 여성들을 휩쓸어 가기 때문에 우리 평범한 남성들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베이트먼의 실험을 시작으로 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부다처제 동물의 경우에 암컷과 짝짓기에 성공하는 수컷은 종종 전체의 5~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수컷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암컷 근처에도 제대로 가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 자연계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나마 일부일처제가 법으로 보장되는 인간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 최재천, <다윈 지능>, 사이언스북스, 2012, 139~140p.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고 계신 아저씨들이 두목 침팬지가 아니면 암컷들에 접근도 못하는 동물사회도 보셨다면 최소한 장가는 들은 자신의 처지를 다행으로 여겼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근자감에 쩔어 마치 어떤 여성이던 자기에게 반할 거라 자뻑하는 청년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지도 모르는 최 교수의 '과학적' 발언에 반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럼 좀 더 쉽게, 그리고 자극적으로 자칭 본능주의자 김어준의 지적을 들어보자. 그가 말을 풀어내는 방식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경험주의적이지만 일단 최재천 교수의 말보다는 쉽게 먹힌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론은 생각치 못한 곳에서 맞닿아 있다.


2년 전 한 여성지가 '부자(남자) 구별법''(남자)차종별 공략'이란 기사로 여론 폭격을 당한 적 있어요.


...


방방곡곡 수컷들 울부짖음, 메아리쳤어요. 천박하다,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난리법석. 한겨레조차 "표현과 정보가 노골적이라 품격 의심된다" 했어요. 그래? 그런거야?


그거, 아니거든. 이 분노 기저엔 공포, 있거든. 내 꺼 하나도 안 남을지도 모른단 불안. 좋은 거 다 뺏길지 모른단 조바심. 내 유전자 멸절될지 모른단 생물학적 위기의식. 이거 생태계 모든 수컷의 숙명적 공포라고. 우두머리의 암컷들 독점 후 자기들끼리 찌그러진 수컷 원숭이 무리의 궁상, 본 적 있으신가. 인간인 내가 다 슬퍼요. 인간 수컷들, 자신들 욕망이 최소공배수로 보장되는 교배 제도, 발명 안 할 수 없었다고. 일부일처, 사랑의 숭고함이 탄생시킨 고귀한 합의, 아니란 거지. 사회적 리비도의 안정 위해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타협이었단 거지. 그러다 보니 무한방사본능 타고난 수컷 유전자 통제를 위해 강력한 사회 억압도 병행 발명됐던 게고. 그리하여 윤리, 종교 모두 이 수컷의 욕망 통제와 기회 균등 위해 복무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긴장의 밸런스, 부자들은, 아주, 간단히, 무너뜨리거든. 재벌들, 여성 스타 사귀면 어떤가. 씨바지 뭐. 딱히 내 것이 될 확률 제로여도 어쨌든 저 색히가 좋은 거 다 차지하잖아. 근데 한 여성지가 그 불평등을 가이드까지 해버리네. 무력한 일반 수컷들, 꼬추 화나겠어, 안 나겠어.


- 김어준, <건투를 빈다>, 푸른숲, 2008, 232~233pp.


누군가는 상스럽다, 천박할 지 모르나 김어준의 말은 직설적이고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에 욕하는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미덕이 있다. 최재천 교수의 진화론적 입장과 김어준의 경험주의적 입장은 그 시작은 다르나 똑같은 곳에 도달한다.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확신하는 남성들과 이에 종속하는 여성들에게 과학적으로 또는 경험론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 (내 주위에 결혼 후 상대에 대한 의무에 복무하는 결혼생활의 스트레스를 운명으로 체념하고 토로한 친구가 있는데 이것 좀 봤으면 좋겠다. 근자감 쩌는 그 분들도 좀... )


마지막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분들을 위한 최재천 교수의 경험담을 소개할까 한다. 우리는 삶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 배운다. 또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 짧은 삶 안에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 매일 스스로의 한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며 아웅다웅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물과학자 최재천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엄연히 숨 쉬고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지 모르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 나는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런 강의를 하는 거의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 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어느 날 졸지에 내가 씌워 준 유전자 렌즈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 최재천, <다윈 지능>, 사이언스북스, 2012, 213~214pp.


우리의 몸과 지금의 삶은 유전자라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잠시 스쳐가는 도구이자 기간일 뿐이다. 그런 거시적 관점에서 봤을 때 굳이 지구의 역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역사로만 대비해 봐도 나는 아주 잠시 스쳐가는 찰나의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염세주의로 빠지기 쉽다. 쉽게 말하자면 '어차피 잠시 스쳐가는 시간,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존재의 목적이 겨우 후세대에 유전자 전달에 불과하단 말인가?'란 회의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이런 좌절의 단초는 우리에게 '만들어진 신'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3'불멸의 코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전자는 자기의 목적에 따라 자기의 방법으로 몸을 조절하며, 몸이 노쇠하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죽을 운명에 있는 그들의 몸을 차례로 포기해 버림으로써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간다.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이다. 말 그대로 불멸의 존재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유전 단위에서 정의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존 기계인 인간은 향후 수십 년의 수명 연장이 기대된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전자의 예상 수명은 10년 단위가 아닌 100만 년 단위로 측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2006, 91~92p.


허무할 수도 있다. 고작 내가, 뭔가 특별한 운명과 사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도킨스의 이 말은 충격적일 수도 있다. 특별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존재가 고작 유전자가 버리고 말, 잠시 스쳐가는 생존 기계에 불과했다니!! 그런데 최재천 교수가 권하는 멘붕극복 탈출비법이 하필이면 그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꼭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것을 권한다.

 

...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DNA'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최재천, <다윈 지능>, 사이언스북스, 2012, 213~214pp.


하지만 너무 좌절할 것도, 포기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비록 잠시 왔다가는 내 육신을 사라질 지 모르지만, 유전자는 이 몸 저 몸을 통해 영원히 여행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우리는 흙에서 와서 생명으로 잠시 살아가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흙이 다시 생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잠시 우연의 일치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지만 그 행운에 감사하며 지금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상을 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마치 자신이 아주 특별한 탄생과 운명의 사람이라는 자뻑만 하지 않는다면 좌절도, 실망도 클 필요가 없다. 눈물을 흘릴 필요도. 운좋게 덤으로 얻은 잠시의 시간을 행복하고 의미있게 쓰는데 전력을 투구하는 게 오히려 더 겸손하고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과학은 이렇게 때로 우리에게 인생의 성찰과 철학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윈주의자 생물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엿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다윈 지능>에는 이 밖에도 종교와 과학의 갈등, 성의 유전학, 진화론 소개 등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많았다. 물론 진화론이 진화법칙이 아닌 이상, 이것이 모두 완벽한 진실이며 법칙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득, 자기가 책에서 봤다며... 책에 나온 것이니 무조건 사실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순진했던 한 여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와 다른, 혹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은 매우 특별함에 틀림없다. 낯선 시선에서의 경험은 스스로의 좁았던 시각을 넓혀주고 더 많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여기 다윈주의자 생물과학자가 새로운 시선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다윈 지능>과 함께 그 즐거운 여행에 참가할 생각 없으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