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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Lab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은 그의 시 <섬>에서 말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한국의 문화적 자본을 공유하고 한국어로 이야기 하는 상대와도 우리는 참 많은 오해를 만들고, 반대로 오해를 받으며 삽니다. 상대라는 섬에 온전히 이르기에는 인간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만나서 얘기하면 풀어질 문제를 전화통화로 다투다 결국 헤어지는 연인들은 이런 대표적인 사례지요. 거의 마지막 멘트는 "난 널 이해 못하겠다!"로 끝납니다.


'이해한다'는 말 자주 쓰시는지요? 그것이 상대의 상황이 됐던, 감정이 됐던 "이해한다"는 말처럼 쉽게 위로로, 혹은 변명으로 쓰이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나 큰 아픔을, 고통을 겪은 사람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 분들 앞에서 "그래 당신의 마음 다 이해한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상대의 머리에 USB를 직렬로 연결한 것도 아닌데 내 앞의 그 사람의 감정과 과거 등을 고려해서 이해할 수도, 그런 노력을 한 적도 없으니까요. 일종의 오만이고 거짓이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부모자식 관계에서부터 십 수년지기 친구나 동료, 심지어 살을 섞고 사는 사이에도 타인이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주변의 아끼는 누군가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 내가 좀 대신 아파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건 내 몫이 아니라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몫일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대신해줄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해한다'고 말하며 상대에게 자신하는 것은 사실 반쯤은 거짓이고 또 반쯤은 스스로의 자만과 착각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소설가 김애란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옆사람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공감능력의 결여를 한탄했듯이, 지금은 공감과 소통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것은 각박한 세태의 탓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진단이 엉뚱한 진료를 낳고 그래서 병을 치료하지 못하거나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신문기사의 여론조사 결과가 기억납니다. 직장생활 혹은 가정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직장동료나 가족과의 관계에서의 스트레스라고. 우리는 매일 만나고 자주 접했다는 이유로 오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그 섬, 그 섬에 가기 위한 열쇠는 오히려 익숙한 것들에 대한 무지와 우리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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