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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법을 배우다] 금태섭 변호사와 정혜윤 PD의 '확신의 함정' 출간기념 북토크 참석기



인터파크도서 북&

[현장스케치] 소설에서 법의 길을 배우다

연일 폭우가 쏟아져 걱정 반 기다림 반 끝에 지난 7월 29일 오후 7시 30분 서강대 부근 문화공간 ‘숨도’에서 금태섭 변호사와 정혜윤 PD의 북토크 행사가 무사히 열렸다.

 

 

이 북토크는 다녀온지 보름이 넘은 것 같다. 나의 게으름과 폭풍 스케쥴로 인해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후토크를 쓴다. 날짜는 좀 지났지만 그 감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금태섭 변호사와 정혜윤 PD의 대화에서부터 짧은 질문과 답변시간까지 어디 하나 빈틈이 없는 알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것은 텍스트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스승이 될만한 현명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사람은 자기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대학 시절 선배가 "야, 수유리에서 상도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봐라. 열이면 열 놈이 다 다른 것을 보고 갈 걸? 같은 길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놈은 나이트만 보는 놈이 있고, 어떤 놈은 서점만 보일거다"라고 했던 말이 경험적인 것임을 슬슬 깨닫고 있다. 한 개인의 작은 경험이 넓디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사람을 판단하는 준거기준이 된다는 것은 옹졸하고 답답한 노릇이지만, 반면에 한 개인의 한계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각각의 경험과 견해를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게다.

 

현재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대립의 문제도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자신만 옳을 뿐, 상대의 말이 일리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느 측이나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하며 정의를 대변한다고 한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며 껄껄 웃어버렸던 황희정승의 고사를 되새기면 갈등과 대립이 굳이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고사가 있던 것이 500년도 지난 오늘날까지 똑같은 상황으로 옥신각신 한다는 것은 인간이 진보하는가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더욱 깊게 만든다. 황희의 말대로 '너도 옳(을 수 있)고, 다른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인 것이다.

 

확신의 함정에서 금태섭 변호사가 꾸준하게 밝힌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자세는 비단 금변호사만의 주장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주장과 의견이 존재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다. 문제는 필수품이라 하더라도 저 싫어 안들고 다니면 그만이듯 '나는 틀릴 수 없다'는 사람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로 둘러쌓인 사회에서는 답답함만 느껴진다. 시대의 화두인 '소통'은 이미 먼 산에 걸려있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 좁은 나라에서 티격태격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갈등과 대립이 없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대화는 하고 협상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부분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참석한 북토크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답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나의 생각은 결국 나의 몫일 뿐, 금변호사나 정PD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연한 태도와 다독/경험을 통한 의견은 내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념이나 계파를 따지기 보다는 좀 더 냉정하게 사안을 바라보고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위터를 하면서 나의 팔로워나 팔로잉이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RT하고 돌려보며 좋아하는 글이란 대개 이명박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욕하는 트윗이 대다수였다. 대통령 이명박의 정책과 비리에 대한 팩트 확인에는 게으르면서도 욕하고 비웃으면 좋아하며 공감을 표하는 데는 사실 적잖이 실망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계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말씀이 많지도 않았고 자연 리트윗이 많지도 않았다. (물론 그래서 리스트로 본다) 사안을 바라볼 때 냉정하게 바라보고 내가 믿는 의견이나 측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이런 현상은 적지 않았을까 싶다.

 

절대적 상대주의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었다'나 '그럴 수도 있지'라는 구차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절대적 극단주의를 달리는 두 세력의 갈등을 보노라면 절대적 상대주의를 주사해 줘도 좀 나아질까 말까 하는 정도가 현 시점의 상태가 아닌가 싶다. 정의를 독점했다고 착각한 두 집단이 서로간에 어떤 살육전을 벌이고 지난 60년간 어떻게 반목해 왔는가가 한국의 현대사 아니던가. 상대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인정하는 것이 해법이다. 그 외에는 서로간에 해묵은 색깔론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그래도 올바름과 정의를 판단하는 작은 준거기준은 하나 제시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 질문에 금변호사는 조심스럽게 이런 답을 내놓았다. "거창하게 이야기 드리기는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정책과 의견이 옳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는 것이 금변호사의 생각이었다. 나도 참 곤란한 질문했다 ㅋㅋ 어렵다 정말. 그거 제대로 알고 있다고, 이게 맞다고 하는 순간 금변호사는 자기 말을 뒤집는 모순에 빠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변호사의 늬앙스는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주류의 의견은 누구나 알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죽어감을 알리는 의견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비등하게 놓고 따져보기 위해서는 소수의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대담론 뿐만이 아니라 내가 매일 만나는 청소원 아저씨에서부터 마트 계산원 아주머니까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어울려 살기위해서는 나 자신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하다. 남들 탓할 것 없다. 나부터 먼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본다. 나는 얼마만큼 '그들이 그럴 수 있다'와 '나는 얼마나 옳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북토크는 그에 대한 따끔한 충고와 함께 내게 새롭게 사회와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어디쯤에 있을지 모르는 정의와 진리, 올바름에 대한 나의 여정은 이제 반면교사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꾸준하고도 겸손하게 계속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신 금태섭 변호사와 정혜윤 PD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