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ab

지록위마와 언브로큰

한량의독서 2015. 1. 10. 00:13

(사진: 영화 언브로큰 스틸컷)

오늘은 극장에 가서 <언브로큰>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을 맡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올림픽에 육상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던 루이라는 남자가 태평양전쟁으로 공군에 입대합니다. 그는 불행히 전투기가 고장 나면서​ 바다로 추락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집니다. 살아남은 동료들과 구명정에 의지해 식량도 식수도 없이 한 달을 넘게 버티지만 결국 이들을 구조한 것은 적인 일본군이었습니다.

포로가 된 루이는 포로수용소의 책임자인 와타나베에게 온갖 학대와 폭력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루이의 올림픽 출전 이력을 안 일본정부는 그를 일본방송에 출연시킵니다. 루이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밝힙니다. 방송은 적국인 미국에도 나갑니다. 방송 후 관계자는 루이에게 원고를 주며 제안합니다. 자신들이 주는 원고를 방송을 통해 읊어 준다면 호의호식을 보장하겠노라고.

자신의 조국에 꽤 이름난 올림픽 대표선수였던 루이가 꼭두각시가 된다면 일본의 대미 프로파간다 공작에 유용할 것이라는 일본군부의 판단이 있었겠지요. 루이의 뒤에는 먼저 항복하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의호식하는 미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루이를 데려온 방송관계자는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그 비인간적인 포로수용소로 되돌려 보낼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원고를 읽어본 뒤 루이는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소. 이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오."

"It's not true."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관람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면서도 이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눈앞의 호의호식을 버리고서라도, 그리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해서라도 지켜야 할 사실, 즉 진실이 있다니요.

작년 말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합니다. 진시황이 죽은 뒤 그의 큰아들 부소扶蘇를 참언하여 죽이고 어리고 용렬한 호해胡亥를 2세황제로 세워 권력을 장악한 조고趙高라는 환관의 고사에서 유래했지요. 권력을 전횡하던 조고가 어느 날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고 "폐하, 말이옵니다"하니 황제는 당연히 "이건 사슴이 아니오?"라고 되물었습니다. 조고가 중신들을 둘러보며 "경들도 이것이 사슴으로 보이시오?"라 물으니 몇몇 강직한 신하는 사슴이라 답했고 다수는 눈치를 보며 조고의 억지에 동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조고는 후에 강직한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하지요.

지식인들이 한 해를 정리해 꼽은 사자성어가 지록위마라니 착찹합니다. <언브로큰>의 루이처럼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려면 많은 것을 잃고 때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정이지요. 그건 진나라 시대에도, 2차대전 시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인간은, 인간 사회는 얼마나 진보해 온 것일까요? 깨어지지 않는 용기로 자신의 결정을 지켜낸 루이를 떠올리며 그의 대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It's not 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