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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百年法 - 야마다 무네키 著, 최고은 譯] 알고 보니 우익 오락물?

한량의독서 2014. 8. 22. 17:05

 

 


백년법 세트 (전2권)

저자
야마다 무네키 지음
출판사
애플북스 | 2014-07-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젊음’의 꿈을 실현한 가까운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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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장생不老長生. 권력과 부를 거머쥔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길거리의 걸인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흔치 않은 절대평등의 조건이다. 역사는 부와 권세를 이용해 죽음을 피해보려고 발버둥쳐온 인간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은 동방으로 불로초를 찾아 떠나겠다는 서불徐佛(기록에 따라 서시徐市 서복徐福으로 불리기도 한다)에게 배와 3천의 동남동녀 등 한 몫 제대로 사기를 당했다. 물론 탐험은 실패했고 서불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른다. 절대권력자조차 사기피해자가 된 이유는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헛된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첨단의학이 발달했다는 현대에 와서도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과는 다르게 재벌총수던 평범한 샐러리맨이던 똑같이 늙거나 병든다. 종국에는 누구나 평등하게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소설 <백년법百年法>은 바로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다. "인간이 늙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백년법>의 세계 안에서는 이루어진 현실이다. 인간은 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냈고 영생의 권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영생의 무료함과 새롭게 불거지는 사회문제로 인간사회는 역시 평온치 못하다. 죽음이 사라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야마다 무네키가 그린 <백년법>이라는 소설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작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작가이기도 하다. 나도 대학시절 나카타니 미키가 주연한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조금 의외기는 했다. '야마타 무네키가 이런 소설을?' 싶었지만 (화려한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이 인상적인 뮤지컬영화의 오마주가 워낙 강렬해서;;) 준수한 편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삶. 그것은 이후에 벌어질 부작용을 고민하지 않고 덥석 물어벤 선악과와 같았다. 여행비둘기 중 늙지 않는 개체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노화억제 바이러스를 찾아낸 인간은 이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HAVI(Human Antiaging Virus Inoculation)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HAVI 시술을 받은 인간은 그 시점부터 노화가 정지되고, 사고나 질병이 아닌 이상 반영구적인 삶을 보장받게 된다. <백년법>의 무대인 일본공화국에서는 이미 대중을 상대로 시행된지 오래이며 수천의 시술 거부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이 HAVI의 혜택을 입어 젊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산다.

 

문제는 HAVI 시술을 받기 전, 의무적으로 작성한 서약서에 기재된 '불로화不老化 시술을 받은 국민은 치료 후 100년을 기해 생존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일명 백년법 조항에서 발생한다. 첫 시술을 받은 사람들이 어느덧 시술 후 100년이 될 시점이 가까워지자 위에서 언급한 백년법百年法의 해석과 그 적용에 관한 격렬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아직 살고 싶어 하는 생명을, 그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없애는 건 역시 잘못됐다고 생각해."

 

"단순히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야. 법을 어겼다고. 그들은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 왜 그걸 모르니?"

 

- 야마다 무네키 저, 최고은 역, <백년법>, 애플북스, 2014

 

온 나라는 두 패로 나뉘어서 백년법의 찬성과 반대를 두고 다투다 결국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된다. 백년법은 부결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시술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층(?)의 불만을 등에 업고 강경파 정치인 우시지마와 우익 관료 우사에 의해 벌어진 정치혁명이 벌어진다. 권력구도가 바뀌면서 백년법은 결국 시행된다. 즉, 시술 받은지 100년이 지나면 법에 의해 인위적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죽음을 거부하고 마을과 네크워크를 형성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삶이 불법인 사람들이다. 이것이 일본공화국의 법이다.

 

소재도 흥미롭지만 소설 속 주변인물 묘사와 사회분위기 설정이 매우 현실적이다. 영원한 젊음이라는 축복 속에서도 청년실업이 늘고, 세대간 갈등이 심각해지는 사회의 모습은 실상 현실의 모자이크다. 인적 정체가 심각해져서 혁신은 일어나기 어렵고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뒤쳐져서 경제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모습 또한 그렇다.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의 공동화 현상으로 인한 '액체사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개인화되고 파편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미래상에 가깝다.

 

용두사미라고 하던가. 한참 재밌게 잘 굴러가던 이야기가 결말로 갈수록 산으로 간다. 이른바 우익 오락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국내작가 중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유명한 김진명 작가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애국, 부국강병, 국가에 헌신 등 우익보수의 미덕이 고스란히 배겨있는 것은 <백년법>도 똑같다.

 

최근 일본에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오락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18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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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은 이 밖에도 오락소설의 신인상 격인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상의 올해 최종 후보 다섯 작품 중 두 작품이 태평양전쟁 말기의 일본군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었다며 이들 소설을 '우익 오락물'로 묶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우익 오락물이라는 말은 소설가 이시다 이라(石田衣良)가 만들어낸 용어로 '당신들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오락 소설을 가리킨다.

 

오락·시대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상의 최종 후보에 포함된 야마다 무네키(山田宗樹)의 '백년법(百年法)'도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지도자가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선조들을 상찬한다는 내용의 우익 오락물이다. (연합뉴스 기사 중)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18/0200000000AKR20130618168300073.HTML?input=1179m)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생존권을 부정하게 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벌이는 사건을 그린 <백년법>은 분명 인권과 생명, 과학윤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소재 또한 흥미로워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도 효과적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소개나 광고에는 이 부분이 강조되고 있다. 반면 일본 내에서도 우익 오락물로서 주목받은 <백년법>의 전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유사 아키히토 총리는 쿠데타 상황에서도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과거 상사 사사하라 내무성 차관을 떠올린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당시의) 지사적 풍모를 발휘해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극우적 결정을 밀어붙여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는 명분으로 '독재관'이란 직위를 신설해서 국가를 이끌고 간다. 일단 위기니까 나라를 안정시킬 때까지 효율적인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한국식 민주주의 維新헌법의 명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중국과 한국 같은 주변국에 일본이 병합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말이다. 사실을 모르고 읽는 독자들은 산으로 가는 결말에 자신의 애국심을 투사해 감동을 받을까. 아니면 용두사미의 결론에 헛웃음을 짓고 말까.

 

칼은 검이 되어 사람을 벨 수도 있지만 부엌에서 가족을 위한 요리를 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우익 오락물이라고 하여 색안경을 쓰고 볼 일은 아니다. 잘만 걸러서 읽는다면 이 소설은 현대사회에 있어 큰 시사점을 제공하는 작품으로 기능할 수 있다.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무기도 될 수 있고 유용한 주방용품이 될 수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