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먹다 - 황교익,정은숙]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
누구나 기억하는 '맛'이 있다. 누구는 이것을 고향의 맛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탯줄이 끊긴 후, 처음 맛본 어머니의 음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입맛을 결정할만큼 강렬한 기억이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맛보는 음식들은 사람과 공간, 문화가 어우려져 하나의 기억으로 완성된다. 중학교 친구와 처음 맛보았던 떡볶이,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과 먹었던 쫄면처럼 '맛'에는 추억과 사랑과 이야기가 묻어있다. 이것이 음식을 단순히 생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 섭취로만 이해하면 안되는 이유이다. 음식에 묻어 있는 사람의 맛과 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음식을 반만 먹는 것과 같다.
서울은 낯선 이들의 도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따스함을 느끼기는 결코 쉽지 않은 차가운 공간이다. 여러 지역 출신의 떠돌이들이 모여들여 이룬 이 거대한 도시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뭐든지 모이면 섞이고, 섞이면 조화를 이루는 법. 객지 사람들이 모인 이곳 서울에서 외로운 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고향의 음식과 맛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전쟁으로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이들이 기억하는 입맛은 서울이란 타향에서 들꽃처럼 다시 피었다. 이 외로운 도시에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라는 메뉴가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식당간판은 서울식당 보다는 전주식당, 목포식당이란 이름이 많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외로운 타향살이에 지친 이들이 모여 기억 속의 음식을 나누며 비로소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인 맛칼럼니스트 황교익과 정은숙이 이 번잡한 도시에서 사연과 풍류를 지닌 서민들의 맛 17가지를 골랐다. 저마다의 향취를 지닌 17가지가 글 속에 맛있게 녹아있다. 저자가 풀어낸 맛들에는 역시 사람과 시대와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재밌게 맛있다. 미각에 더해지는 이야기의 즐거움이 맛을 찾아 헤매는 맛손들을 설레게 한다. 일단 메뉴부터 한 번 보자.
서울 설렁탕
종로 빈대떡
신림동 순대
성북동 칼국수
마포 돼지갈비
신당동 떡볶이
용산 부대찌개
장충동 족발
청진동 해장국
영등포 감자탕
을지로 평양냉면
오장동 함흥냉면
동대문 닭한마리
신길동 홍어
홍대 앞 일본음식
을지로 골뱅이
왕십리 곱창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평소에 친숙하게 먹고 즐기던 메뉴들이라 '이게 무엇 새롭단 말인가?'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통에서 서민들이 즐기는 이 맛들에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서울의 역사를 읽는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낸 우리네 사람들의 사연 많은 사연을 풀어낸다. 고향을 떠난 이야기, 힘들게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이야기 등등 사연도 많다. 맛은 그렇게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로 재정의된다.
<서울을 먹다>에서 '마포 돼지갈비'를 소개하며 등장했던 마포 (진짜 원조) 최대포 ⓒbookplayground.com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문화재가 됐던 음식이 됐던 그에 얽힌 사연과 역사를 알고 나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단순한 돼지갈비나 곱창에서도 그 음식이 생기게 된 연원과 이유를 알고 나면 단순히 먹는 즐거움 뿐 아니라 앎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나면 흔하디 흔한 음식에 배여있는 우리의 삶을 더욱 깊이있게 느낄 수 것이다. 마포 최대포에 갔을 때,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소갈비를 뜯지 못했던 서민들이 돼지갈비라도 뜯으며 애환을 달래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었던 것도 <서울을 먹다>의 덕택이었다. 아버지 월급날이나 돼야 통닭이나 짜장면으로 외식을 한 번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불쑥 떠올랐던 것은 덤이었다.
<서울을 먹다>를 보면 저자가 직접 찾아가 취재한 맛집 주인들의 고집있는 육성도 읽어볼 수 있다. 현장감 풍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 번쯤은 '나도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욱 유익한 부분은 바로 이어지는 풍부한 이야기들이다. 저자가 연구하고 찾아본 사료와 신문기사 등을 통해 맛의 뿌리를 찾아가는 대목은 맛집을 탐방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음식기행이다. (홍어 어쩌구를 특정 지역의 비하로서 입에담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경상도의 돔뱅이 이야기도 함께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뒀으니 얼마나 폭넓은 기행인가)
언젠가 마포 최대포를 찾아갔을 때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찬 손님들은 저마다의 이야기 열심이었다. 하루의 애환과 스트레스가 소주 한 잔에 풀어진다. 쌉싸름한 소주의 기운은 든든한 돼지갈비가 재워줬다. 갈비 한 점을 먹고나면 다시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밤은 깊어졌으며 서민음식의 문화는 이어졌다. 불금인 오늘, 나도 사무실 사람들과 함께 퇴근하고 최대포로 회식을 하러 가기로 했다. 과연 오늘 자리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서로 이야기가 뜨거워지면 넌지시 마포 갈비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맛이 가진 역사와 이야기는 좌도 우도, 위도 아래도 없을 것이니. 음식은 그렇게 모두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