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칼럼니스트 홍사중 선생의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 보면 "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는 밉상의 전형이 소개돼 있다.
쪽팔린 말이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을 때까지만 해도 난 그 모양 그 꼴이었다. 내 실제 형편이 어땠던 간에 주위에 "우는 소리, 넋두리" 꽤나 하고 다녔다.
언젠가 백주에 맨정신으로 늘어놓던 내 엄살에 스터디 동료였던 아무개 륜씨가 따끔히 한 마디 했었다.
"오빠, 오빠는 그래도 제대로 된 교육이라도 받았잖아요? 어떻게 배운 것도 없고 극빈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그 순간의 화끈거림이란. 이후로 "우는 소리, 넋두리"는 그만뒀다. 그 순간에도, 이후에도 참 고마운 충고였다.
어제부터 전 한겨레 기자 김기태가 지은 <대한민국 건강 불평등 보고서>를 읽고 있다. 열악하다 못해 전무한 의료복지서비스 통계를 보며 분노한 것도 잠시였다.
눈물이 찔끔 났다. 책보다 눈물 난 거 정말 오래 전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그렇게 한 세상 떠나가는 이들의 사연은 그 어떤 통계, 논문, 자료보다도 깊은 슬픔이었다.
"우는 소리, 넋두리" 한 마디 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 그저 "운명이려니..."하며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혀짤린 하나님'이란 다소 과격한 제목으로 알려진 김흥겸의 <민중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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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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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프고 죽어가는 아들, 딸들의 절규에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살릴 수 있는 아들, 딸들을 외면하시는 하나님.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들을 방종케 방관하시는 하나님.
"주여, 어찌하여 나를 바리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