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사회

[한국 사회와 그 적들 - 이나미] 한국 사회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법

한량의독서 2013. 4. 19. 12:53




한국사회와 그 적들

저자
이나미 지음
출판사
추수밭 | 2013-03-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열심히 살아도 늘 불행하다고 느끼는 한국인, 당신이 힘든 건 당...
가격비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참여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선배가 내뱉은 한 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래도 미치지 않고서 살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 나름 자기 원칙 하나만은 지키려 애썼던 사람인데..."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돼 정신 없는 선배지만 그 당시에는 참 치열하게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노 전 대통령을 평가한 한 마디에서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바로 그 '미치지 않고서 살기 어려운 한국에서'였다. 제정신으로 살기에는 너무 큰 손해를 보거나 혹은 주위로부터 물러터졌다는 비웃음(?)을 당하기 쉬운 한국사회다 보니 일정부분 미치지 않고서 살기 어렵다는 선배의 평가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OECD 회원국 중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미쳐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제목이 일단 눈에 띄었다. 전체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패러디임을 금새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상처받고 아파하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위한 저자의 심리상담서다. 융 심리학을 배경으로 국내외 다양한 사람을 상담했던 저자의 경험이 곳곳에 녹아있어 쉽게, 내 일 혹은 내 주변의 일처럼 읽히는 것이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의 미덕이다. 다양한 사람을 상대했던 만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넓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불과 반백년 전만 해도 한 외국인 장군으로부터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란 평가를 받았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세계 12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은 분명 기적이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팽창한 외면에 비해 그 속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한국인의 삶은 질은 전세계 행복지수에서 100위권안에도 들지 못할 뿐더러 자살률은 부동의 1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대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잘 살아 보세'라며 앞만 보고 달렸던 우리가 잃어버린 미덕과 전통들이 너무나 많다. 돈을 버는데만 정신이 팔려 잃어버린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 돌보지 못한 개개인 내면의 '상처와 콤플렉스' 등 희생한 것들이 그렇다. 자기 집을 갖고 그럴 듯한 자동차를 굴려도 행복하지 못한 건 황폐화된 내면의 탓이 크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불행한 일상에서 일탈하기엔 생활인으로서 살아갈 것이 걱정돼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비루한 일상을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전쟁을 치러냈고 산업화세대의 일꾼으로 오늘의 경제부흥을 이뤄낸 노년층은 이제 빈곤하고 아픈 여생을 걱정하고 있다. 각종 가계빚과 과도한 업무량에 치여서 자신을 돌보지 못한채 억지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잊는 장년층은 너무나 흔하다. 보수화된 사회에서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주눅들어 본래의 패기를 잃어가는 청년층의 한탄이 깊은지 오래다. 압축성장한 국가답게 전근대와 근대, 현대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세대간 갈등도 깊다. 각 개인이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이 불행한 게임을 울며 겨자먹으며 수행해야 하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어른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 역시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그들은 어른들이 놀랄 정도로 삐뚤어지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최근에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거리의 아이들' 편을 보면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대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갈 사회가 지금보다 더욱 절망적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 것들은'이라며 혀를 차기에 앞서 기성세대와 부모들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발달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의 도덕 관념은 학교에 들어갈 나이 이전, 양육자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고 뛰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 때리거나 욕하는 폭력적 행동, 약한 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태도, 절도나 거짓말 등의 비도덕적 행동에 대한 죄의식은 유치원 이전, 말을 배우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똑똑하고 경쟁적인 일부 부모들은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설령 네가 잘못해도 사과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을 이겨라(커닝이나 폭력 정도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것만 챙겨라(약하고 아픈 사람 도와줄 필요 없다)'와 같은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보내 자녀들을 냉혹하고 지능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 이나미, <한국 사회와 그 적들>, 추수밭, 2013, 81p.



사실 우리가 불행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나만 잘 먹고 행복하려는 데 있다. 옆의 누군가가 쓰러져간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과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는 근시안적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는 홉스의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개인은 고독해지고 서로 간에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긴장과 스트레스는 증가하고 소모되는 정신적 에너지와 필요로 하는 물질적 자원은 늘어난다. 기본적으로 행복의 감정이 여유와 풍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지금과 같은 사회분위기는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장기간 이 상태를 버텨낸다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대목처럼 이기적인 부모와 그를 보고 배워 유전처럼 간직하는 아이들을 봤을 때 이것이 혹여 세대를 이어 오래갈수도 있겠구나 싶은 불안감이 든다. 사회병리적인 현상이 일상이 되고 다수가 그렇게 행동할 때, 이것은 문화가 되고 둔감해진 우리는 이를 '현실'이라 받아들이며 자포자기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집단, 교육, 허식, 불신, 세대, 가족, 폭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심리학적, 의학적 분석을 통해 나름의 이유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쉬운 대목은 역시 딱히 대책이 될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통해 병의 원인과 현 상태를 파악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처방이나 시술은 마땅치 않은 모양새다. 그럴만도 하다. 단순히 칼에 베인 외부적 상처라면 외려 적절한 치료를 통해 나을 수 있겠지만 저자가 다루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상처들은 그렇게 소독하고 약을 바른다고 해서 나을 성질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의 말미에서 상처받은 한국인들에게 간단한 조언을 던진다. 그것은 "홀로 고독을 이겨낼 수 있는 활동들(독서, 스포츠, 취미활동 등)을 통해 상처를 이겨낼 건강한 자아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말로만 보면 참 쉬운 말이고 이상적인 해결책이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개선이 어려운 만큼, 개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들은 대다수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일에 정답이 없듯 각 개인의 내면에 자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결국 스스로가 쥐고 있다.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이 정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스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면의 상처를 직시하는데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좋은 거울이 돼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볼 필요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