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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 탁재형] 여기 있는 이 맛있는 술,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요

한량의독서 2013. 4. 10. 19:18




스피릿 로드

저자
탁재형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2-26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다 ‘세계테마기행’ 탁재형 PD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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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 모르고 소주를 입에 털어넣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양의) 술을 마셔댔다. 같이 마시던 사람들은 친구, 연인, 가족 등 다양했고 술잔을 든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화가 나서, 너무 기쁜 일이 있어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서 등등 여러 이유를 들어 술잔을 들었다. 술과 함께 먹었던 음식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좋은 안주를 찾아 일부러 먼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숙취가 없다며 일부러 해물요리를 챙겨먹기도 했고 맛있는 안주를 먹기 위해서 술을 마신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다양한 술자리 멤버들과 각종 안주가 바뀌는 동안에도 바뀌지 않은 한가지는 주종이었다. 단연 압도적으로 소주가 많았고 가끔 맥주가 끼는 정도였다. 아주 가끔 위스키나 칵테일이 구색을 맞추긴 했지만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한국을 점령한 소주를 마시지 않고선 마땅히 마실 만한 술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소주燒酒라는 말은 원래 끓여燒 만든 술이란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물에 주정과 조미료를 탄 희석주稀釋酒가 '소주'란 이름을 참칭하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무렵 전통주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다.


전통 방식으로 증류한 소주燒酒를 마셔봤다. 도수가 높기는 했으나 그 향과 목넘김, 위장을 쓸고 내려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싸구려 빼갈이나 소주에 적응된 입맛에도 한 잔술에 '아, 좋은 술이다'고 느낄 정도였다. 좋은 술 한 잔을 들이키고 나니 허영만의 만화 <식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식객>의 주인공 '성찬'이 일본인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해 감동시킨 메뉴는 화려한 반찬이 아닌 '가장 맛있는 밥'이었던 것이다. 나는 좋은 안주를 먹겠다고 덤빈 적은 있어도 '좋은 술'을 마시겠다고 찾아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밥상의 주인인 밥은 묵은 쌀로 만든 싸구려로 먹으면서 반찬만 고급으로 먹겠다고 덤빈 꼴이었다. 술상의  주인공인 '술'을 홀대해 놓고 주당을 자처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순간이었다.


<스피릿 로드>는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의 연출을 맡았던 탁재형 PD가 기록한 세계 술기행이다. 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주당들이라면 누구나 입맛이 도는 책일게다. 소주에 지쳐있던 애주가(이며 독자)들의 필독서라고 본다. 저자는 세계각국을 취재하고 촬영하면서도 그 나라와 그 지방의 전통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이 대목이 저자가 크게 칭찬 받아 마땅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와 유럽, 남미, 러시아, 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저자가 엄선한 '좋은 술'에 대한 이야기들은 단지 읽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술향기 가득한 텍스트다.


세계 각국의 술을 소개하는데 있어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나라, 그 지방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 습성 등의 맥락을 짚어보는데 있다. 저자는 단지 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살아온 술을 통해 해당 지역을 둘러 보는 것이 아닌, 오감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여행을 그렸다. 아프리카 수단의 전통주 '아라기'를 마셨던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라기 수꾸수꾸'(주-아라기는 수수 등으로 발효시켜 증류한 수단의 전통주. 특히 아라기 수꾸수꾸는 최고급 아라기)는 나에게 척박하고 혹독한 수단 남부의 자연을, 부족 간의 전투와 내전 속(주-수단은 부족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당하고 있는 지역이다)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곳 사람들의 성정을, 그리고 종교적 박해(주-2010년 3월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술을 마시거나 파는 자들은 모두 채찍질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슬람 국가인 수단에서는 음주자를 40대의 채찍질에 처하도록 한다)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이 가진 생명력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지금은 이걸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몇 남지 않았어. 이것도 이웃마을의 한 할머니한테서 어렵게 구한 거야."


말릭이 약간 서글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이슬람 정권의 탄압이 심하고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를 죄악시 하더라도, 아라기 수꾸수꾸는 할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어머니에게서 딸로 계속 명맥을 이어갈 것임을. 그리고 부족 간의 다툼에 지친 사내들이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어질 때 그 자리를 지킬 것임을.


- 탁재형, <스피릿 로드>, 시공사, 2013, 77~78p.


술 한 잔에 담긴 의미는 적지 않다. 단지 먹고 취하는데 익숙한 한국식 문화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그렇다. 복잡하기만 해보이는 정치, 종교, 군사 등의 이야기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고 삶의 일부분이 되는데 술은 빠질 수 없는 윤활유다.


유일하게 한국의 좋은 술로 등장하는 술이 바로 송명섭 장인이 되살려낸 죽력고竹瀝膏 되시겠다. 육당 최남선이 그의 <조선상식문답>에서 전주의 이강고梨薑膏, 평양의 감홍로甘紅露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주로 꼽은 술이 바로 전라도의 죽력고다. 죽력고란 푸른 대나무에 불을 쬐여 나오는 푸른 기름과 생강, 석창포, 계피, 솔잎 등을 전통방법으로 증류한 소주와 혼합해 만든 전통 명주다. 술이기도 하지만 사람 몸에 잘 흡수되고 좋은 성분이 많아 약에 가까운 효능을 지닌다고 한다. 조선 말의 학자 매천 황현이 쓴 <오하기문梧下奇聞>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사로잡혀 고초를 겪은 후 심신이 망가졌지만 이 죽력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해 허리를 꼿꼿히 펴고 서울로 압송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가 끊길 뻔한 명주 '죽력고'를 되살려낸 사람이 전라도 정읍에 살고 계신 송명섭 장인이다. 죽력고의 부활과 송명섭 장인이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으며 안타깝고 화가 나는 부분은 역시 뒤늦은 뒷북행정과 관치주의다.


"그럼 선생님께서 만드시는 죽력고도 약효가 있겠네요?"

"옛날의 죽력고는 분명히 약효가 있었고, 옛 방법 그대로 만드니 아마도 약효가 있지 않을까 싶다'까지만 말할라요. 안 그라믄 또 나가 이것을 약이라고 선전혔다고 관청에서 뭐라 할 것잉께."


장인의 말에는, 죽력고 생산면허를 얻기까지 규제일변도인 해당관청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거쳐야 했던 때의 분노가 묻어났다.


"처음엔 죽력이 약이라고 했다 혀서 안 된다 하고, 다음엔 용기 때문에 안 된다 하고, 그거 해결하니 전통방법과 다르다고 해서 안 된다 하고, 어떻게 하면 규제가 풀립니까 하니 당신이 만든 술을 설치류, 비설치류에 6개월간 반복 투여해서 DNA 변형이 없는 걸 증명해라...."


- 탁재형, <스피릿 로드>, 시공사, 2013, 291p


나라에서 도와준 것도 아닌, 한 개인의 고집스런 장인정신이 이뤄낸 성과도 공무원과 해당관청엔 그저 '일거리 늘었다'였을 것이다. 물론 행정책임을 지고 있는 해당관청이 국민의 보건과 안전을 위해 까다로운 절차와 과정을 요구하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통주를 되살려내는 과정에서 도움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한 나랏님들이 막상 어렵게 만들어 가니 감놔라, 배놔라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우긴 어렵다. 국민들이 정부와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건 책임있는 자세지, 어떻게든 면피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보신주의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장인을 힘들게 하는 건 나같은 주당들도 한 몫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송명섭 장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엔 비싼 술을 만들 수가 없으요. 제조 원가와 노동력만 인정허지 기술력은 인정을 안 혀. 나가 이것을 한 병에  10만 원 받겠다고 하믄 원재료가 뭐냐, 재료값의 25%까지만 이윤을 붙일 수 있다, 허는디 어디 와인은 포도가 한 송이에 몇만 원씩 해서 그리 비싼감? 나의 술은 예술인데 그것을 원가를 가지고 평가한다면 누가 이것을 만들겠소. 그 시간에 논에 가서 일을 허제."


- 탁재형, <스피릿 로드>, 시공사, 2013, 291~292pp


와인이라면 수십 만원도 아깝지 않게 생각하면서 전통주 한 병에 몇만 원하면 '왜케 비싸?'며 툴툴댔던 애주가들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 술도 높은 기술력과 품질을 갖췄다면 응당 값비싼 대우를 해줘야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한국 술문화다. 자꾸 싼 것만 찾는다면 우리의 음주생활은 희석식 소주와 빼갈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들은 그것들 대로 마시되, 우리에게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술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우해줘야 진정한 명주 하나 쯤은 있는 나라에 사는 주당이라 할 수 있지 않을런지.


<스피릿 로드>를 읽게 되면 술이 고파진다. 술 한 잔을 하지 않고서 텍스트에 담긴 각국 명주들의 흥취를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좋은 술 사다가 마시며 읽었다) 하지만 단순히 술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술에는 자연히 함께하는 친구, 가족, 연인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반가워하며 술을 찾는다. 술을 향한 여행은 곧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자, 이제 집에 들어가는 길에 떠오른 그리운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자. 그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인생 여행의 한 순간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이 허락한 몇 안되는 축복이다. 마음껏 즐기시길.